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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워치> 130호 (PDF 전문)
  현대 과학자들의 공격적 무신론 경향에 대하여 (ver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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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er : mahlerian     Date : 08-11-05 01:32     Hit : 7953    
1.
과학과 종교 사이의 양비론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이 종교에 가한 결정적인 일격. 아인슈타인은 양비론이었다가 범신론으로 결국은 무신론으로 개종한 궤적이 보임.
 
도킨스도 아인슈타인의 이 견해가 담긴 편지를 구하고자 경매에 참여함.
 
아인슈타인 "종교는 유치한 미신"
 
아인슈타인 '무신론 편지' 4억여원에 팔려
 
* * *
 
 
(...)
 
아인슈타인은 지난 1954년 1월 3일 철학자 에릭 굿카인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게 신(god)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 또는 산물에 불과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성경에 대해서도 "명예롭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라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대인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2대 대통령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던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주장 역시 믿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유대인의 종교는 다른 모든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미신을 구체화한 것"이라며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유대 민족이라고 해서 다른 인간 집단보다 우월한 점은 없었다"고 말했다.
 
(...)
 
 
 
  
2.
동국대  장대익 교수의 개종 과정 역시 매우 인상적.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에서 장대익이 쓴 역자 서문을 읽어보면 이런 대목이 나옴(2002년).
 
"나는 선택의 단위 문제를 저자(킴 스터렐리)보다 더 심각하게 여기고 있으며, 진화심리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해서는 저자보다 훨씬 덜 비판적이다. 또한 과학과 다른 지식(가령,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만큼은 도킨스, 굴드, 그리고 저자의 견해를 모두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참고로 굴드는 진화론자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종교에 관대했던 사람임. 그런데 그런 굴드도 못마땅하다? 하지만, <프레시안>의 이번 논쟁에서 장대익 교수가 첫 포문을 연 글을 보면 확연한 변화가 느껴짐(2006~2008년). 종교에 가장 비타협적인 도킨스의 손을 들어주고 있음.
 
"솔직히 저는 요즘 도킨스의 외침이 진실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적인 정직성을 견지하다 보면 종교는 더 이상 인류에게 필요 없는 '밈(meme)' 같아 보입니다. 유효 기간이 지나 버린 밈인데도 사람들이 거기에 뭐가 더 있을 줄 알고 계속 그 주위를 맴도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과학에 의해 대체되거나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유물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래의 논쟁의 다른 글에서 장교수는 자신은 한때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제는 무신론적 진화론자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음.
 

"우리는 지금 '중세'로 회귀하는 걸까요?"  / 장대익
과학과 종교의 대화 <1> 왜 대화가 필요한가?
 
'왕의 귀환'인가, '탕자의 귀가'인가? / 신재식
과학과 종교의 대화 <2> 종교와 과학, 다시 만나다
 
"절도, 교회도 가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 김윤성
과학과 종교의 대화 <3> 과학과 종교 사이의 모호성
 
"반성 없는 과학, 중세 기독교와 다를 게 뭔가요?"  / 신재식
과학과 종교의 대화 <4> '자연주의적 인간'과 '종교적 인간'
 
"종교는 말살해야 할 정신의 '바이러스'?" / 장대익
과학과 종교의 대화 <5> 과학은 종교를 어떻게 보는가?
 
"세계관을 바꾸면 종교가 사라질까요?" / 김윤성
과학과 종교의 대화 <6> 종교와 과학의 한계
 
"이런 논의는 이제 그만 합시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 <7> 독자의 말, 말, 말
 
"서울 봉헌하고, 사탄 없애달라는 저들…"  / 장대익
 
"종교에 손 내민 과학자…그의 '속내'는?" / 장대익
과학과 종교의 대화 <9> 종교인의 '과학'은?
 
"종교는 과학을 '시녀'로 보는가?" / 신재식
과학과 종교의 대화 <10> 기독교가 바라보는 과학
 
"'창조 과학', 기독교는 거부합니다"  / 신재식
과학과 종교의 대화 <11> '진화 vs 창조' 논쟁을 보는 다른 시각
 
"9·11은 '종교 전쟁'의 결과가 아니다" / 김윤성
과학과 종교의 대화 <12> 종교가 만악의 근원일까?
 
"KAIST에 버젓이 '창조과학관'이 있다니…" / 김윤성
과학과 종교의 대화 <13> 나의 창조과학 탈출기
 
"KAIST, 서울대 '접수'한 교회…그 다음은?" / 장대익
과학과 종교의 대화 <14> 나의 '진화 vs 창조' 논쟁사
 
"사이비 '과학'이 한국 교회를 삼키다" / 신재식
과학과 종교의 대화 <15> 나의 '창조 vs 진화' 논쟁 관전평
 
"과학-종교, 한 쪽에 꼭 판돈을 걸어야 하나?"
과학과 종교의 대화 < 16 > 독자의 말, 말, 말
 
"소통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과학-종교의 현모습" / 김윤성
과학과 종교의 대화 < 17·끝 > 연재를 마치며
 
 
 
 
3.
스티븐 와인버그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서 소칼 논쟁을 주도하기도 하는 등 모더니스트로서 일관되고 인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음. <과학 전쟁에서 평화를 찾아(Facing Up)>에서 종교에 관한 그의 얘기는 자주 회자되고 있음(원래는 <뉴욕타임스> 북리뷰에 기고한 글).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악한 사람은 악한 일을 할 수 있지만, 선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데는 종교가 필요하다.”
 
“나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화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 대화는 건설적인 대화는 아니다."
 
 
* * *
 
(…)
 
복음주의 평신도인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와 유일신교의 목사인 미국의 윌리엄 엘러리 채닝을 포함하여, 독실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운동이 강화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나라의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세기 동안 노예제도와 더불어 안락하게 살아남았고, 노예제도는 신약성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렇다면 윌버포스와 채닝 같은 반노예제 기독교인들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새로운 성경이 발견된 것도 아니고 윌버포스나 채팅이 초자연적 계시를 받았다고 한 적도 없다. 오히려 18세기에는 합리성과 인도주의가 퍼져나가 아담 스미스, 제레미 벤담, 리처드 브린슬리 세리던 같은 사람들 또한 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토대 위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도록 했다. 서머셋 사건의 판결문을 작성한 맨스필드경은 전통적인 종교인이었지만 그의 판결문에는 종교적인 논증이 없다. 윌버포스가 1790년대에 노예무역 반대운동을 주도했지만, 이 운동은 신앙심이 없다고 알려진 찰스 제임스 폭스, 윌리엄 피트와 같은 다수의 의원들로부터 실질적인 지원을 받았다.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도덕적 시대정신이 종교로부터 혜택을 받은 것보다 종교가 도덕적 시대정신으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았다.
 
실제로 종교는 차별을 만들고 노예제를 반대하지 않고 지지했다. 성경의 논증이 노예무역을 방어하기 위해 의회에서 사용되었다. 프레데릭 더글러스는 그의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에서, 그의 주인이 함(Ham)의 후손들에 대한 처벌로서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종교로 개종하면서 노예로서 그의 조건이 더 나빠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마크 트웨인은 그의 어머니가 사탄에게조차 동정을 보내는 상냥한 마음을 지녔음에도, 남북전쟁 전에 미주리주에서 여러해 동안 살면서 노예제 반대하는 설교는 들어본 적이 없고 대신 노예제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교만 수도없이 들었기 때문에, 노예제의 합법성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한 적이 없었다고 묘사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악한 사람은 악한 일을 할 수 있지만, 선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데는 종교가 필요하다.
 
미국 과학진흥협회의 전자메일을 통해 나는 이 컨퍼런스의 목적이 과학과 종교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나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화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 대화는 건설적인 대화는 아니다. 과학의 위대한 업적들 중 하나는, 지적인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못하게 만들 수 없다면 적어도 그들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업적으로부터 우리는 한발자국도 후퇴해서는 안된다.
 
 
 
4.
아래는 리차드 도킨스의 '믿음에 대한 타당한 증거와 잘못된 근거'라는 글에서 도킨스가 특히 믿음의 잘못된 근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이 글은 <악마의 사도(Devil's Chaplain)>(바다출판사 출판)에도 실려있지만, <과학은 모든 의문에 답할 수 있는가(How things are?>(두산동아 출판)에도 있음.
 
 
* * *

(...)
 
과학자들이 이 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배워 나갈 때 증거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 짧은 편지에서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교묘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무언가를 믿게 해 주는 좋은 증거에 대한 이야기를 이쯤에서 그치고, 잘못된 믿음을 주는 세 가지 나쁜 근거에 대해서 네게 경고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각각 '전통', '권위', '계시'라고 불린다.
 
그러면 먼저 전통에 대해 살펴보자. 몇달 전에 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약 15명의 어린이들과 토론을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종교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에 초대되었다. 어떤 아이들은 기독교, 다른 아이들은 유대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도로 키워진 아이들도 있었다. 사회를 맡은 남자가 돌아가면서 아이들에게 그들이 믿는 것에 대해 물었다. 이때 아이들이 한 대답은 정확히 내가 의미하는 '전통'을 보여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증거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 아이들은 단지 자신의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믿음을 자랑스럽게 떠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양친이나 조부모의 믿음 역시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저마다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우리 힌두교도들은 이러저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이슬람교도돌은 이러저러한 것들을 믿어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 믿음을 가져요."
 
그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옳을 수는 없다. 마이크를 쥐고 있는 남자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고, 아이들의 믿음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토론에 부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는 요점은 아니다. 단지 나는 그 여러가지 믿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그 믿음들은 모두 종교에서 왔다. 전통이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끝없이 전달되는 믿음이다. 또는 책을 통해 수세기 동안 다음 세대에 전수되기도 한다. 우리가 전통적인 믿음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필경 누군가가 맨 처음에 그저 우연히 그런 믿음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토르(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우레와 농업의 신)와 제우스에 대한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서 수세기 동안 전해졌다. 단지 너무도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인지라 특별하게 생각될 뿐이지 어떤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실을 믿는다. 그것이 바로 전통이다.
 
전통과 연관되어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이야기가 아무리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원래의 이야기가 옳은지 그른지에 따라 현재에도 옳든가 그르든가 하다는 사실이다. 만약 네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지어낸다면, 아무리 많은 세대를 거쳐 전달되더라도 조금도 사실에 가까워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영국 국교회에서 세례를 받아왔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기독교의 많은 종파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밖에도 러시아 정교회, 로마 카톨릭, 감리교 등 여러 교파가 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신앙을 가진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좀 더 다르다. 그리고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도 여러 종교가 있다. 그런데 사소한 신앙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그 불일치 때문에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너는 그 사람들이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신념을 가질 수 있는 뭔가 상당한 이유 - 근거 - 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상이한 믿음은 순전히 다른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특정한 전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로마 카톨릭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매우 특수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성모 마리아'라고 부르고,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육신을 가진 채 천국으로 올라갔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종파에서는 로마 카톨릭처럼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그녀를 '성모 마리아'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마리아의 육체가 천국으로 들어올려졌다는 전통은 그다지 오래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그녀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다. 사실 성경은 그 불행한 여인에 대해 거의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육신이 천국으로 올라갔다는 믿음은 예수가 살던 시대에서 6세기가 지난 후에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마치 백설 공주 이야기가 지어진 것처럼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가 지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야기는 하나의 전통으로 발전했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수세기 동안 전해져 왔다는 단순한 이유를 근거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전통이 오래될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이 공식적인 로마 카톨릭의 믿음으로 기록된 것은 극히 최근인 1950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네 나이만 했을때에야 비로소 공식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고 6백년이 지난 후에 처음 지어진 이야기보다 1950년에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야기가 더 사실적인 것은 분명 아니다.
 
나는 이 편지의 말미에서 조금 다른 식으로 다시 전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겠다. 하지만 먼저 어떤 것을 믿는 데 있어 두가지 다른 잘못된 근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바로 권위와 계시(啓示)이다.
 
어떤 것을 믿는 근거로 작용하는 권위란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 네게 그것을 믿으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믿는 것을 말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교황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단지 교황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반드시 옳다고 믿는다. 이슬람교의 한 종파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야톨라'라 불리는 수염을 기른 나이든 사람이다. 많은 이슬람교도들은 기꺼이 살인을 저지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순수하게 멀리 떨어진 조국의 아야톨라가 그렇게 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서 로마 카톨릭이 성모 마리아의 육신이 천국으로 올라갔다는 믿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시기가 비교적 최근이 1950년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은 1950년에 교황이 카톨릭 교도들에게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교황이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성모 마미라의 육신이 하늘로 들어올려졌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교황이 생애 동안 한 이야기는 일부는 사실이었고 다른 일부는 사실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교황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보다 교황이 하는 이야기를 특별히 더 믿어야 한다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현재의 교황은 그이 추종자들에게 자식의 수를 제한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만약 사람들이 교황이 원하듯이 그의 권위를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지나친 인구증가로 식량부족, 질병, 그리고 전쟁이라는 끔직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물론 과학에서도 스스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나도 직접 내 눈으로 빛이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린다는 증거를 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빛의 속도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는 책을 믿는다. 이것도 권위처럼 생각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권위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 책을 쓴 사람이 증거를 보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 증거를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육체가 천국에 오르면서 점차 모습이 작아졌다는 이야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믿음의 잘못된 근거의 세번째 종류로는 '계시'가 있다. 만약 여러분이 1950년에 교황에게 성모 마리아의 육체가 천국으로 점차 사라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면, 그는 그 모습이 '계시'를 통해 나타났다고 말했을 것이다. 교황은 자신의 방안에 혼자 틀어박혀 자신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겼고, 점점 더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적 감정에서 어떤 것이 사실임에 틀림없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 - 설령 그런 느낌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 그들은 그것을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교황만은 아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어떤 사실을 믿는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바로 그 계시이다. 그렇다면 계시는 과연 올바른 근거일까?
 
가령 내가 네 강아지가 죽었다고 이야기한다고 하자. 필경 너는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퍼부을 것이다. "정말이예요? 어떻게 그걸 알지요? 내 개가 어떻게 죽게 되었지요?" 그때 내가 이렇게 대답한다고 가정해보자. "실은 페페가 죽었는지 알지 못한단다. 아무 근거도 없어. 단지 나의 깊은 내부에서 페페가 죽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만약 이런 말을 듣는다면 너는 공연히 깜짝 놀라게 만든 내게 마구 항의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내면적인 '느낌'이 그 자체로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네게는 분명한 근거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 경우에 따라 내면적인 느낌을 가진다. 그런 느낌이 사실로 밝혀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느낌을 갖는다. 그렇다면 누구의 느낌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개가 죽었는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가 정말 죽었는지 살펴보거나, 심장의 박동이 멈추었는지 귀를 대 보거나, 개가 죽었다는 실제 증거를 듣거나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는  네가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느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잘못된 주장이다. 누군가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너를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함께 지낸다면 너는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는 작은 증거들을 무수히 듣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성직자들이 계시라고 부르는 감정과 같은 순수한 내적 감정이 아니다.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뒷받침에 주는 외면적인 사실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상대의 눈빛이나, 그 사람의 목소리에 스며 있는 부드러운 어조, 작은 호감과 친근감, 이 모든 것이 실제적인 증거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강한 내면적인 느낌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엉뚱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자면 실제로 그 사람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유명한 영화 배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식의 강한 내적 확신을 갖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삐뚤어진 마음의 소유자이다. 내적 감정은 반드시 확실한 이유와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느낌을 믿어서는 안된다.
 
마음속의 느낌은 과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네가 나중에 증거를 찾아 그 느낌을 검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만 가치가 있다. 과학자도 옳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개념에 대해 '육감'을 가질 수 있다. 육감이나 느낌 자체가 무언가를 믿을만한 타당한 근거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실험을 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을 보내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그 근거를 찾는데에는 좋은 이유가 될 수 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과학자들은 착상을 얻기 위해 자신의 내적 느낌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확실한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기까지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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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하   08-11-06 13:47
양비론은 둘 다 틀렸다는 주장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도 맞고 종교도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신앙주의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지만 이신론이나 범신론은 존중했으며 스스로 범신론을 자처했습니다. 따라서 양비론이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말 중 무신론에 가장 가까운 말은 아마 "내게 신(god)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 또는 산물에 불과하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너무나 애매해서 범신론과도 그리 모순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범신론을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문제로 책까지 썼군요. <Einstein and Religion: Physics and Theology(Max Jammer, 1999)>
mahlerian   08-11-06 14:53
이덕하/
그렇네요. 저는 비교하는 대상 둘이 다 맞다, 내지는 다 틀렸다고 하는 논리가 양비론인줄 알았는데, 둘 다 틀렸다고 할때만 양비론이라고 하는 것이 사전적 정의네요.

범신론에 대한 지적도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전 범신론과 무신론은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보고요(전자가 좀 감성적인 정도?). 아인슈타인이 만년에 공격적 범신론자가 되었다는 생각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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