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IMF 구제금융 당시 양신규 교수님이 쓰신 글입니다. 소재는 시의성이 없지만, 논리는 아직도 살아남아 우리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시일야 방성대곡을 하는 사람과 정서적으로 (heart) 가장 잘 통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mind)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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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구제금융, 제2의 한일합방인가?
구제 금융 발표를 보고, 누군가가 시일야 방성대곡을 썼다. 나라가 무너진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끼는 분들에게 동양 선비의 풍모가 풍긴다. 진솔한 곡을 하는 한국 지식인을 보는 것은 태평양 넘고 미국 대륙 건너에 있어도 하나의 감동이다. 사실은 오늘 나도 아무것도 못했다. 점심때, 친구들과 만나서도 그 얘기, 저녁때 한국은행 출신, 또 여기서 MBA 하는 학생과 만나서도 그 얘기, 또 다른 고분야 전공하는 친구들과 전화로 또 고 얘기를 했다.
우리나라가 파산했는가? 우선은 파산했다고 우겨야 되겠다. 한국사회를 가위누르던 부패관료와 세습재벌의 구조가 파산했다고 우겨야 되겠다. 마치 18,9 세기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위누르던 봉건양반체제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무너진 것에 비유하고 싶다. 생각해 보니 양반체제 역시 작금의 부패관료-세습재벌 연합체제와 똑같이 재촌지주-세도정치관료의 결합체인 정경유착 체제였다.
일제는 두 가지 기능을 했다.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의 자주적 근대화 운동을 짓밟은 일이다. 두번째는 재촌지주-세도정치관료 연합체를 불완전하게 해체한 일이다. 아마 반은 일제하에서도 친일 귀족으로 반봉건 지주로 전화했고, 저항한 반은 지위와 재산을 수탈당했을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우리 민중운동과 지식인들이 성숙해 있어서 동학혁명군과 개화파 지식인들이 결합한 자주적 반봉건 근대화 운동이 성공했다면 일제하의 치욕은 없었을 것이다.
일제-친일귀족의 연합 체제가 붕괴된 것은 미군의 힘에 의해서였다. 미군 역시 두 가지 기능을 했다. 하나는 자주적 통일 근대국가 수립의 민중운동을 짓밟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친일귀족 연합체제를 불완전하게 해체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다. 친일귀족의 반이상은 살아남아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를 받고 다시 이땅의 지배층으로 살아난다. 강력한 민중운동이 지주계급을 청소하는 데에까지는 성공하지만, 친일부패관료들은 그대로 살아남고 박정희는 이들을 보호하면서 새로운 세습재벌을 키워낸다. 다시 이땅에 18,9 세기 양반체제와 같은 식의 부패관료-세습재벌 연합의 약탈정치경제 체제가 수립된다.
이 체제가 지금 붕괴하고 있다. 구제 금융 요청은 무엇인가? 이것은 마치 내부 모순을 견디지 못한 조선 체제가 스스로 일제를 불러 한일합방에 조인하는 식이 아닌가? 오호 통재라. 결국은 IMF 는 강력한 재정긴축을 요구 할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대량실업이 엄습한다. 나라를 빼앗긴 슬픔은 어린 백성이 가장 크게 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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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지식인을 만나서 같이 얘기나누고 이런 날은 정말 소주라도 한잔 먹고 싶다. 우리를 낳은 조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는 사람들과 한잔 술을 기울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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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난 시일야 방성대곡을 하는 사람과 정서적으로 (heart) 가장 잘 통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mind) 전혀 다르다.
[1] 우선 구제금융은 전혀 국가 주권의 침해가 아니다. 근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국민의 보통선거에 의한 정부 선택권이 빼앗긴 것이 아니다. 통화와 재정정책에서 심한 제약을 받을 것이지만 국가가 그것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12월 대선에서 자유롭게 대통령을 뽑을 거고, IMF 나 미국 정부가 그 결과를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다.
[2] 부패관료-세습재벌의 약탈 경제제제도 그래서 그대로 유지된다. 물론 재경원의 막강파워가 많이 줄어들 것이고, 재벌들도 예전처럼 국민들 저축을 물쓰듯 낭비하는 짓을 예전 만큼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 자체는 우리 경제 체질에 장기적으로 매우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게 부패관료-세습재벌의 붕괴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전혀.
[3] 부패관료-세습재벌은 (내가 들은 좋아하는 비유는) 두 머리 한몸통의 호랑이이다. 국민을 수탈할때는 연합체이지만 지들끼리는 으르렁댄다. 이 두 머리 중에 부패관료의 파워가 줄고 재벌의 파워가 늘 것이다. 이 이유는 이렇다. 이 과정에서 파워를 행사할 미국무차관 Larry Summers 나 Stanley Fisher 가 알고 있는 것은 국가주도경제의 문제이지, 국가주도 재벌육성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의 움츠렸던 단계를 지나면 세습재벌들은 시장논리를 내세워 백년시차를 이용한 사기극을 부릴 것이다. 은행과 금융기관을 소유하려할거다. 미국적 적자생존의 시장질서를 요구하는 IMF 와 교묘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결국 한국적 강자생존의 시장질서를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할 거다. (적자생존과 강자생존의 차이는 정운찬 교수의 글에서 인용)
[4] 한국경제는 다음 정권에선 누가하더라도 일부러 죽쑤지 않으면 좋아진다. 멕시코의 경우는 페소화 가치가 반으로 떨어진다음 가격경쟁력이 살아나서 경제가 서서히 그러나 건실하게 살아나고 있다. 한국은 제 2의 멕시코, 좀 더 건강하고 똘똘한 멕시코이다.
[5] 진보 정치세력은 이 과정에서 별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약해지고, 유일하게 잘하던 파업투쟁마저 열기를 잃게 될 가능성이 많다. 단순히 말하면 우리노동운동이 국내총자본과는 싸워 봤지만 세계 총자본과는 싸워본 경험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대체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유일한 길이라면, 반재벌 친시장 노선을 분명히 하고 선택적 파업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일인데; 이게 얼핏보기에 국내자본에는 저항하고 세계자본에는 순응하는 정책으로 보일수가 있다. 1차대전때 제국주의 전쟁임을 간파하고 매국노의 비난을 무릅쓰고 무조건 전쟁 반대를 주장한 레닌류의 혜안이 아니면 이런 노선을 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영국 노동당은 하고 있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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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IMF 구제 금융은 별게 아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분명 우리나라 세습재벌-부패관료 구조의 파산이지만, 우리 진보 정치역량의 미숙으로 전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실천적으로는 재경원의 세력약화 외에는 별 달라진게 없다. 어떤 면으로는 우리 경제의 허약체질을 개선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우리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의 대응능력이 전무한 것이다. 그런데 그건 언제는 안그랬나?
(1997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