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 교수님의 재반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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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규교수의 `인문학 위기론 문제점`에 대한 반론
오랫만에 양신규교수가 텍스트를 좀 괜찮게 읽고 반론을 하는 것 같아서 반갑다.
양신규가 100% 동의한다는 "인문학도 충분히 엄밀하고 실용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내가 내 글에서 한 주장이 맞다. 그런데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내 주장을 한 문장으로 만들라하면, "엄밀한 인문학적 사유는 좋은 인문학 교육을 통해 훈련될 수 있고, 이러한 사유를 할 수 있게 훈련된 학생들은 무척 실용적인 일도 잘 할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사유의 교육과 훈련이 내 글의 초점이었는데, 양신규의 반론에서는 이 부분이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아서 유감이다. 그래서 센큐님이 얘기했듯이, 양신규의 글은 엄밀=실용?이라는 식(틀린 equation)으로 읽힐 수도 있다.
양신규가 나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을 하길 바랬는데, 성수대교부터 샛길로 빠지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 섭섭하다. 아마 본인이 얘기한대로 내 얘기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한가지 이유가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양신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충분히 접수가 된다. 인문학의 위기의 근원은 "엄밀하지 못한 헛소리나 해대는 포스트모던 gibberish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는 "모던"보다는 "포스트모던"에서 건질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뭐 양신규의 이런 얘기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다. 모던이건 포스트모던이건 제대로 교육하고 연구하는 풍토가 아직 잘 정착되어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해 얘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양신규는 내가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에 대해 쓴 논문("첨단 기술 시대의 독점과 경쟁 - 마이크로소프트 소송과 새로운 경제학의 패러다임" 과학사상, 1998 여름, 나중에 나의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에 재수록)을 들어, 불충분한 인문학적 연구가 학생들의 교육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대로된 인문학자가 이 문제를 접근한다면, 어떤 기술적 법률적 경제적 이슈가 이문제의 핵심과 주변에 있는지에대한 소개, 개괄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이문제에 대한 "광대한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어 내고 "Sense Making"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일단 MS소송에 대한 내 글에 대해 잠간 얘기를 해야겠다. 이 글은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MIT에 방문교수로 있던 98년 1월에 씌어졌다 (당시 양신규와도 이 얘기를 주고 받았던 것 같은데...). 당시는 미 법무부의 본격적인 반독점 소송이 시작(98년 5월 18일)되기도 전이었다. 나는 이 글을 프론티어에 연재했는데, 당시 이것을 읽은 회원들이 재미있다고 해서 독립된 글로 만들어 본 것이었다. 읽고 쓰고 하는데, 한 2-3주 걸린 글 같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 전공연구만도 항상 산더미처럼 밀려있는 나로서는 엄청난 시간을 써서 쓴 글이었다.
이 얘기를 왜 하냐하면 바로 다음과 같은 양신규의 비판이 그 과녁이 잘못잡혀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홍성욱이 이 문제를 전혀 낭만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어떤 변호사가 하나 있는데, 그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학생들이 그걸 마이크로소프트케이스라고 읽고 토론한다면... 한마디로 한심한 것이다.
MS에 대한 내 글의 핵심주장이 무엇인가. 그것은 "Brian Arthur와 Paul David의 새로운 경제학 이론(increasing-return, path-dependency)이 MS를 독점이라고 고소한 사람들의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Brian Arthur와 Paul David의 새로운 경제학은 기술 발전과 표준에 대한 새로운 역사학적 이해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내 논문의 초점은 MS가 독점인가 아닌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MS를 독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 글은 이런 복잡한 생각들의 관련과 이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p. 382)).
첫번째 문제(MS가 독점인가 아닌가)는 양신규의 얘기대로 방대한 법률적, 경제학적 지식이 필요한 주제이다. 아마 이 문제를 다루는 경제학자라면 Brian Arthur의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Liebowita & Margolis의 주장의 타당성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그 중 어떤 것이 더 타당한가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논문의 초점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 글은 이런 문제에 대한 글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나의 초점은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를 했고, 이런 경제학 이론이 MS와 같은 기업과 그들의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즉 독점으로) 보게 했는가"의 인과고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규명을 위해서는 양신규가 얘기한 "어떤 변호사 하나"는 무척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개리 레벡(Gary Reback)이라는 반-MS 소송 전담 변호사인데, 사실 그가 작성한 "백서"때문에 MS사가 Intuit을 합병하려한 시도가 법정에 의해 무산되었고, 그 "백서"에 레벡은 Brian Arthur의 경제학 이론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이론으로 인용, 이용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경제이론이나 법제학사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사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날 지 모르지만, MS 소송에 대한 내 글에서는 내 주장을 support하는 매우 중요한 evidence중 하나이다.
인문학 교육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신동아에 실린 인문학 위기에 대한 내 글을 좋은 선생에 의한 학생들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는데, 만약에 양신규 식으로 내 MS 소송에 대한 글을 학생에게 읽히면, "한마디로 한심한" 수업 밖에는 안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내가 text에서 하려했던 핵심은 파악 못하고, 왜 (자신의 생각으로 볼 때 더 중요한) 이러이러한 얘기를 안 했냐는 토론 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인문학 위기" 글에서 주장한 얘기는 바로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하면, 인문학 위기를 영원히 벗어나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이런 사고는 "인문학적으로 엄밀한" 사고도, 인문학적으로 바람직한 텍스트 읽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의미가 있다. "당신의 주장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당신은 왜 MS 소송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문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를 놔둔채로 당신에게 관심이 있는 문제에만 매달렸는가?" 그렇지만 이런 비판에 대해서도 나는 할 말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내 글이 결코 MS를 포함한 정보산업과 관련한 경제학이나 반독점 역사의 정치학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제공해주는 글이라고 뻥튀긴 적이 없다. 나는 이 글이 아주 제한된 주제에 대한, 제한적인 효용성만을 지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려했던 핵심 주장은 잘 support된 글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뭐 이걸 대단한 논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나는 MS소송에 대한 글을 포함해서 한글로 쓴 어떤 글이나 책도 영문 이력서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2-3주 황금같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이런 글을 쓴 이유는, 너무도 중요한 MS 소송과 같은 주제에 대해 훨씬 더 잘 알만한 양신규 같은 경제학자들이 아무런 얘기도 안하고, 아무런 글도 안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물안 개구리 남한지식인"만 나무라지 말고,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좋은 글을 써주는 것이 실천이고 세상에 대한 기여가 아니겠는가.
(2000년 0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