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변희재가 인물과 사상 게시판에서 저 읽어보라고 써준 글입니다. 97년말인가, 98년말인가 군대가기전에 읽은 글이죠. 막 풋풋한 20대 초입때구만요.
그땐 이게 도대체 뭔 충고인가 했는데 저도 나이를 먹고서 더 성숙해지고서 이 글 다시 읽을때마다 가슴이 아립니다. 아, 나도 저런 때가 다 있었구나. 뭐, 사람 기본 골간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듯 하지만.
그러고보면 변희재도 예나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고,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리고, 변희재가 인용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온다는 대사,
"비록 지금 힘들더라도, 살아있다보면 살아있다보면 언젠가는 살아있기를 잘했다는 순간이 올 거야."
놀랍게도 skyang님 역시도 언젠가 지나가는 소리로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살아봐. 그렇게 안죽고 살다보면 아, 그때 안죽고 살아있길 잘했다 싶은 순간이 반드시 온다니까."
남보고는 그래놓고 자기는?
그 글 다시 읽고 훌쩍 했어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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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팬은 연애 못한다
'강준만 팬은 연애 못한다.' 제목 참 선정적이지요? 아니면 어떤 놈이 강준만 교수님에게 앙심품고 유언비어 퍼뜨린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런 제목에 혐오감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이텔 플라자란에 조회수만 노린 이런 류의 제목이 올라오면 별 내용없을 가능성이 99%이기 때문입니다. 욕 먹어도 싸지요. 하지만 저는 조회수에 별 관심없습니다. 단지 제목 그대로 이 글의 주제가 '강준만 팬은 연애못한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제가 선정적 제목이면서도 그 제목과 주제가 일치할 수 있다는 단 1%의 가능성에 도전해보겠습니다. 혹시 썰렁해도 제 선의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욕만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일반화의 오류에 참 많이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교수님이 들으면 때려죽일 놈이라 욕하시겠지요. 이런 생각을 갖고 공식적으로 검증된 것처럼 떠벌린다거나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한다면 위험하겠지만 독특한 사고를 하는데는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제가 그때부터 만들어 낸 일반화의 법칙이 무려 14가지입니다. 위의 제목과 비슷한것 들이지요.
14가지 중에 사실 잘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 중 몇 개는 써드리고 싶지만 그게 바로 공개적으로 떠벌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제하겠습니다.
일반화라는 것은 특수한 개별사례들을 모아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는 것을 말하지요? 이번 것도 특수한 개별 사례들에서 시작했습니다. 제 주위에 강준만 교수님 팬이 4명(저를 포함해서) 있습니다. 팬이라면 최소한 '인물과 사상'단행본과 월간은 정기적으로 보고 강교수님 책 10권 이상은 읽은 사람을 말하지요.
단 4명입니다. 그런데 이 4명 모두가 연애를 못합니다. 한 40명쯤만 되도 법칙이 성립할까요? 에이, 그렇지도 않겠지요. 이 곳에 결혼하신 분이나 연애하고 계신 강교수님 팬도 있을테니까요.
하여간 제가 가지고 있는 표본에서는 '강교수님 팬은 연애를 못한다.'라는 법칙이 100%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때부터는 차분히 생각해봤습니다. 이 4명이 갖고 있는 공통 특성이 뭘까? 우선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흥분을 잘한다는 것. 애들 술 먹고 비틀거리는 거 보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이 사람들 못 넘어갑니다. 둘째는 그냥 덮어두면 될 문제를 꼭 들고 일어나서 일 크게 벌리는 성격들입니다. 셋째는 세상에 대해 원수진 사람처럼 불만이 많다는 것. 넷째는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뭐, 다 비슷한 경우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연애를 포함한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혹시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읽으신 분이 있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정신적인 교감이 이성간의 사랑이라 생각하신다면 [좁은문]을 좋아하실겁니다. 반면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같이 육체적 쾌락을 이성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한 우리 4인방은 이 둘 어느 것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혹시 라끌로의 [위험한 관계]를 보신 분이 있으신지요? 별로 유명한 소설이 아니긴 하지만 꼭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8명의 남녀간에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인데 완전 병법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복하기 위해 갖은 계락과 책략을 다 쓰고 속임수에 연막작전에 온갖 추잡한 꼴은 다 보여줍니다. 이 소설이 프랑스에서 18세기에 출판되었는데 20세기 초반까지 금서였을 정도이니 알만하죠?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30대의 바람둥이 남자가 정숙한 유부녀를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아. 영화 [발몽]아시지요? [위험한 관계]는 [발몽]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이 바람둥이의 이름이 발몽인데 정숙한 유부녀를 유혹하면서 약간의 갈등을 느낍니다. '내가 정말 투르벨 부인을 좋아하는 것인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발몽 자신도 지금 자신의 행위가 사랑인지 단지 정복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제 3자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두 가지 측면을 다 갖고 있는 것이지요. 표리관계라는 것입니다. 좋게 봐주면 사회적 제도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이고 나쁘게 보면 치졸한 바랑둥이의 행각인 것입니다.
전 이것에 관한 정답은 없다고 여깁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아시지요? 이것 역시 불륜 아닙니까? 그런데도 얼마나 애달프게 썼습니까? 저는 발몽이나 베르테르의 행위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일 뿐이지요.
괴테가 발몽을 그리면 아름다운 사랑으로 그렸을 테고 반면 라끌로가 베르테르를 그렸으면 정복욕에 불타다 자살한 선무당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감이 오지 않습니까? 왜 강교수님 팬 4인방이 연애를 못하는지. 강교수님은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냥 누르는 놈 누르게 놔두고 당하는 놈 당하게 놔둬도 누가 누르고 누가 깔리는지 모른다면 아름다운 세상이다하고 착각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강교수님이 [전라도 죽이기]에서 바로 이 심정을 나타낸 적이 있습니다. 지역문제를 터뜨리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덮어놓는 것이 옳은가?
어쩌면 이렇게 라끌로의 고민과 똑같습니까? 라끌로 역시 18세기 귀족들의 추잡한 연애 행각을 폭로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된 후의 상황도 강교수님과 비슷합니다. 욕 얻어먹고 금서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는 책 한 권도 못 쓰고 조용히 살다 죽었습니다. 물론 강교수님이야 계속 활동하지만 사회적 반응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연애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제 친구 중에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의대생이 한 명 있습니다. 집안도 아주 유복합니다. 이 친구는 플라토닉 사랑을 꿈꿉니다. 이 친구가 가장 비판하는 것이 중매 결혼입니다. 어떻게 신성한 남녀관계를 조건으로 맺어줄 수 있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연애하는 여자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집안 환경도 학력도 거의 비슷한 같은 대학 여대생입니다. 저보고 중매를 서라 해도 이토록 딱 맞는 커플은 맺어주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농담 삼아 이 친구에게 '나는 조건에 딱 맞는 여자랑 중매해서 결혼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이 친구는 길길이 뜁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관계 역시 좋게 봐주면 지고지순한 사랑이고 나쁘게 보면 그냥 조건 맞는 사람과 적당한 관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자의 짝짓기는 처절합니다. 가장 강한 사자가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지요. 과연 인간의 짝짓기가 아프리카 사자에 비해 얼마나 숭고한 것일까요? 숭고한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때쪽에 우리가 그토록 인정하기 싫고 보고 싶지도 않고 애써 외면하고 싶은 추잡한 모습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추어내어 반대쪽을 보는 사람은 인간의 남녀관계라는 것이 동물의 교미와 별 다를 바 없구나하며 회의하는 것이고 앞면을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전에 과에서 신입생 한 명 축하파티를 해준다고 해서 과방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복학생들은 그냥 먹을 것 있겠지 하고 간 겁니다. 먹을 것 참 많더군요. 그런데 사회자가 갑자기 불을 끄더니 라이터 불을 켜달라고 요청하더군요. 뭐, 복학생이야 담배 다 피니 들어줬습니다. 그러더니 '사랑하기 때문에'를 부르랍니다. 불렀지요. 그런데 이 신입생이 너무 감격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복학생들 그때 참 미안해 했습니다. 그냥 먹으러 간 건데 자신을 위해 와줬다고 울음까지 터뜨리니.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신입생에게는 우리가 먹으러 왔건 축하해주러 왔건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수십 명이 와서 라이터불 흔들며 노래불러 주었으니 그냥 자신이 '아. 나를 축하해 주러 왔구나'느끼면 그만인 것입니다.
4인방 중의 한 명이 얼마 전에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32살이니 참으로 오래 끌었지요. 남녀 관계 그렇게 욕하더니 왜 연애하냐고 따져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자기가 아름다운 사랑이다라고 느끼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너무 많이 알면 다쳐."
미학에서 대중예술을 평가하는 기준 중에 가장 확실한 것이 생명력입니다. 순수예술이라는 것이 인간의 모든 부조리를 파헤치고 의식에 떠올린다면 인간은 살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이런 작업을 하던 실존주의 작가들이 얼마나 많이 요절했습니까? 대중예술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너무 회의적으로 빠지지 않게, 정도 이상 알지 못하게, 그리고 적당히 즐기면서 살도록 도와줍니다.
신세기 에반겔리온의 대사를 아시지요?
"비록 지금 힘들더라도, 살아있다보면 살아있다보면 언젠가는 살아있기를 잘했다는 순간이 올 거야."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를 향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순수예술이고 죽지 않고 살아 있도록 하여 살아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주는 것이 대중예술입니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관계는 이렇듯 삶과 죽음을 오가는 아주 위태로운 관계인 것입니다.
저는 강교수님이 계속해서 성역을 파괴하며 금기와 싸우는 것을 보면 바로 이 위태로운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강교수님도 고백했듯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라며 회의하고 주저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연애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 때 과에서 일어나는 치정사건들에 질려 과학칙에 과 커플 금지 조항을 넣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 남성이 한 여성과 사귀는데 드는 비용 계산하고 난리를 친 적도 있었습니다. 애인에게 선물사준다고 날 뛰는 애들 비웃은 적도 있습니다. 연애는 결국 짝짓기 시장의 교환거래이다라며 애들 설득하러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리포트로 길게 써서 제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쩌다 방구석에 혼자 있게 되면 '도대체 내가 왜 이럴까? 이 젊은 나이에 그냥 남들처럼 재미있게 연애하며 사는 게 뭐가 나쁜가?'이런 생각도 많이 하게 됩니다. 저희 4인방 모두의 고민입니다.
라끌로의 고민과 강교수님의 고민과 저희 4인방의 고민에서 공통점이 있다라고 말하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간략히 말해서 모든 부조리 다 캐고 다니는 사람들은 연애 못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성역과 금기를 파괴하는 강교수님의 작업에 동의하는 사람이 그럴 가능성이 좀 더 많을 것입니다. 이것만 인정해주실 수 있다면 저의 1%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은 성공한 셈입니다.
-제가 mahlerian님과 채팅을 하는데 mahlerian님이 아직 연애를 못해봤다고 해서 문득 생각나 올렸습니다. 혹시 mahlerian님도 저희 4인방과 같은 부류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빨리 생각바꾸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