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논법
이자율이 5%이고, 주어진 기계가 매년 $100만의 이윤을 낼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자. 현재 가치 원리에 따르면 , 그 기계는 $2000만(=100만/0.05) 의 물리적 양을 갖는다. 그러나 만일 기대 이윤이 $120만으로 높아지면? 그러면 현재가치는 $2400만이 된다. 그러므로 그 기계는 고정된 한 가지 자본 ‘량’을 갖지 않는다!
클라크의 분배 생산성이론은 자본에 관한 순환논리에 입각해 있다: 주어진 자본량의 한계 생산성에 의해 이윤의 크기를 설명하는 한편, 그 자본량은 바로 그 이윤의 함수이다! 클라크는 그가 증명하길 바라는 것을 가정했다.
1960년 “상품에 의한 상품 생산”에서 스라파는 ‘자본량’(‘quantity of capital’)은 순환 논법임을 증명했다.
스라파는 그런 자본량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그것이 자기-모순이 됨을 보였다. 그래서 자본의 ‘물리적 ’ 양은 허구이고 그것의 생산적 공헌도는 가격과 분배(클라크의 이론이 설명하려고 했던 바로 그것)를 모르면 측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스라파의 공격은 자본량과 이자율 간에 존재한다고 주장되던 연관성에 주로 향해졌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질적인 자본재들을 직접적으로 자본으로 함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자율을 보면 간접적으로 합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다른 모든 것이 같다고 하면, 이자율이 높을수록, 자본은 노동 대비 더 비싸지고 , 따라서 노동에 비해 덜 고용될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 한 생산적 과정의 ‘자본 강도’(=자본량/노동량)는 이자율과 음의 관계가 있다. 물론 그 관계는 유일해야 한다. 각 ‘자본 강도’는 오직 하나의 이자율과 연관된다. 그렇지 않으면 , 똑같은 자본이 여러 가지 ‘강도’를 갖게 된다. 그렇지만 스라파는 , 신고전파 이론과는 반대로, 자본 강도가 이자율과 1-1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예를 들어, 2가지 기술이 있는 경제를 생각하자. 과정 X는 자본 집약적이고, 과정 Y 는 노동집약적이다. 이자율이 높아지면 자본은 노동에 비해 비싸지고 , 신고전파 이론에 따르면 , 자본가들은 X에서 Y로 생산을 이동한다. 그렇지만 , 이자율이 계속 높아지면 , 과정 Y 가 더 비싸지면서 자본가들은 X로 원위치 할 수가 있다. 원위치는 예외가 아니라 대세이다. 그 결과는 논리적 모순이다. 이자율이 자본 강도와 역의 관계이면 , X는 자본 집약적(낮은 이자율에서)이기도 하고 노동집약적(이자율이 높을 때)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똑같은 자본재들이 상이한 자본‘량들’을 나타낸다. 스라파파의 연구의 결과로 이윤이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았을 뿐만이 아니라 자본재에게도 고정된 ‘량’이 없게 되었다.
캠브리지 자본 논쟁 (http://en.wikipedia.org/wiki/Cambridge_controversy )
로빈슨과 스라파가 가르쳤던 캠브리지 대학과 많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본거지였던 매사추세츠 대학 간에 이 자본의 양을 둘러싼 논쟁이 1960년대에 전개되었다. 결국 폴사무엘슨이 이끄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고 클라크의 자본에 대한 신고전파 정의를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의 ‘우화’로 취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자본의 물리적 양이 없으면 생산함수라는 관념도 파괴된다. 그러면 신고전파의 공급곡선도 무효가 된다. 공급곡선이 없으면 , 균형이라는 관념도 없게 된다. 균형이 없으면 , 가격과 양들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들은 마치 캠브리지 논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자본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묘사한다. 신고전파 이론은 사상누각에 기초한다. 자본이 물질적 실체로서 자기 자신의 생산성을 갖는 측정 가능한 물리적 단위라는 관념은 기초가 없음이 판명이 났다. 그래서 신고전파 이론은 가격들과 생산의 구조를 설명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구조에서 나오는 소득의 분배도 설명하지 못한다.
2번째 더 미묘한 방법은 자본을 수량화 하는 문제는 ,비록 원리상으로 심각하긴 하지만, 실제는 제한된 중요성만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고전파 이론의 과하게 비현실적인 가정들을 보면, 실제 세계와의 유관성으로 그것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은 괴이하다.3번째의 그리고 아마도 가장 정교한 대응은 분리된(disaggregate) 일반 균형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일반균형이론은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경제시스템의 모든 면들을 개념적으로 묘사하려 한다. 그러한 모델들에서 생산함수는 아무리 미소한 개별적 인풋들이라도 그것을 분리하여 명시함으로써 자본재들을 자본으로 합산할 필요가 없다. 일반균형이론에는 심각한 이론적이고 경험적인 약점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무시하는 것 즉 자본에서 온다. 그들의 분해(disaggregation)에 대한 강조는 존재론적 오류이다. 사회적 과정들은 원자들이나 분자들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제도들과 조직들 수준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이 개별적인 물리적 인풋들로 구성될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의 중심적인 사회적 총합으로서의 그것의 존재와 중요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중추적인 개념을 무시함으로써 , 일반균형이론은 공허한 형식론에 불과하게 된다.
(자본량의 측정의 역사에 관해서는 “capital as power” , http://dieoff.org/_Economics/Nitzan%20and%20Bichler%20-%20Capital%20As%20Power.pdf 참조)
다시 농장 일꾼 역설로 돌아가자.
위에서 보았듯이 자본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본의 생산성 측정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생산성을 측정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농장일꾼이 사무실에서 편하게 일하는 노동자들보다 왜 더 적은 보상을 받는지를 물으면 경제학자들은 사무실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더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산성이 더 높은지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하면 그들은 임금이 더 높은 것을 보면 생산성이 더 높음에 틀림없다고 대답한다!
경제학자들이 이런 대답을 하는 이유는 물론 생산성 측정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본의 양을 측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아담스미스가 제시한 분업에도 그 이유가 있다.
아담스미스는 2가지 타입의 분업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공장 내 분업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 간 분업이다. 분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완제품을 만드는데 부품들이 많고 이 부품들은 다른 기업들에서 생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많은 부품들의 생산성을 알길이 없음으로 완제품의 생산성도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배분의 효율성이 분배의 공정성을 함축하지 않는다. 즉 이론은 시장에서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자.
1917- 2005년 사이 미국 최상위 가구 1%. 0.1%, 0.01%의 세금 공제 이전 소득의 비중
(http://en.wikipedia.org/wiki/File:Share_top_1_percent.jpg )
경제학자들의 한계 생산성 이론에 따르면 미국의 최상위 1% 부자들은 1920년대-30년대에 생산성이 극도로 높았다가 미국이 가장 번영하던 1960-1970년대에 가장 생산성이 낮았다가 최근에 다시 엄청 높아졌다.
그렇지만 다른 설명도 있다. 위키피디아의 미국 소득 불평등(http://en.wikipedia.org/wiki/Wealth_inequality_in_the_United_States) 기사를 보면
“재산 불평등의 원인들
금융 자원들 돈 배분 부자들의 높은 저축과 자산 축적 부자 소유 자산에 대한 더 높은 수익률 (부자들은 전문지식을 가질 수 있고, 그들의 저축에 대한 수수료나 다른 요금들은 작은 투자 대비 더 적다)
부자들에 대한 낮은 신용 비용과 신용 제약들. 낮은 이율의 신용에 대해 접근가능하기 때문에 이윤 수준도 높아지고 투자 기회도 넓어진다. 6. 인플레
본질적으로, 부자들은 돈이 더 많은 돈을 벌게 하여 주는 더 큰 금융 기회들을 갖는다. 주식시장 또는 뮤추얼 펀드로부터의 어닝들은 재투자되어 더 큰 수익을 가져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투자되는 금액은 점점 더 커진다. 그렇지만,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들의 기회들을 증진하고 그들의 경제적 위치를 개선할 금융 자원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빚을 갚고 난 후에 가난한 가족들은 나머지 소득을 부를 생산하지 못하고 시간이 가면서 감가되는 그런 품목들에 지출해야 한다. 홑부모 가정의 62%는 저축이나 금융 자산이 전혀 없다. 빚을 지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재산을 축적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따라서 생활 조건들을 개선하지도 못한다.
부자에게도 빈자에게도 , 축적 또는 빚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부자들은 그들의 돈으로 더 큰 수익을 창출하고 빈자들은 수익을 얻거나 빚을 갚을 저축이 없다. 부유한 부모들은 자식들이 더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재산을 물려준다. 반면에 , 빈자들은 그들의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금융 자원들이 많기 때문에 부자들은 그들의 돈을 분산 투자할 수 있다. 반면에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들의 돈을 은행 예금 계좌나 주택 소유에 사용한다. ”
부자들은 투자할 금융 자산을 갖고 있고 , 이것이 여러 번 투자되면 그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것은 “복리의 기적”(http://www.kiplinger.com/columns/starting/archive/2007/st110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