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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 제자들이 정말 불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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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mahlerian
Date : 11-12-11 16:40
Hit : 1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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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URL : http://www.skepticalleft.com/bbs/tb.php/01_main_square/99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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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이구야, 누가 이준구 교수 좀 말려주세요.
본인이 교과서 집필같은 것을 학자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야 지 자유지만, 어찌 저렇게 제자들에게까지 학문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심어줄 수 있습니까?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준구 교수는 어려운 학술지에 실린 전문지식, 대중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전문지식이 어떻게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냐고 그럽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지요. 저는 어떻게 저리 학문의 본질에 대해 무지한 분이 외국 대학에서 학위까지 했는지 이해가 안가요. 진짜 학위가 맞는지 조사를 해보고 싶단 생각마저 다 듭니다.
논문을 통해 발표되는 새로운 초정밀 지식이 일으키는 사회파급효과는 무슨 대중접근성과는 하등 상관이 없어요. 현대에는 전문성의 심화 때문에 오히려 대중접근성이 없을 수록 더 좋은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지요.
상대성 이론은 당대에 세 사람 정도나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고 현대에도 이해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이론이 현대의 과학과 공학은 물론, 산업 전체에도 근본적인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급지식이란건 그냥 알만한 사람만 이해하고 다녀도 세상 바꾸는데 문제 없어요.
물론, 좋은 논문, 좋은 지식이 반드시 맨 처음부터 좋은 학술지에 실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죠. 현대에 DNA 발견 논문부터 시작해서 과학계에서 중요한 임팩트 논문들은 거개 <네이처>니 <사이언스>니 주요 A급 학술지를 통해서 발표됐거든요.
한가지 분명한건, 지식과 관계되어서 논문은 몰라도 특정한 교과서따위가 한 사회를 바꾼 예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타임>지 선정 20세기의 인물이 되었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남의 업적을 주워다모은 교과서같은 것 쓰고서 한 세기는 커녕 한 분기의 인물이라도 된 사례는 전혀 없습니다.
'세계 최고의 정론지'(?)인 <뷰스앤뉴스>라면 인물을 그리 선정할 수 있을지몰라도, 정상적인 공신력이 있는 매체는 그렇게 못하죠.
생각해보세요. 아니, <수학의 정석> 홍성대가 언제 자신이 세상을 바꿨노라 어디 주장하고 다니는 것 보셨나요? 이준구 교수가 책 좀 몇권 팔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진 것 같네요.
이준구 교수의 착각은 더 있습니다.
이준구 교수는 외국(그가 유학을 다녀온 미국을 추정됨.)의 대학이 주관적으로 학자를 평가한다고 그랬는데, 이 말도 정말 어불성설입니다.
국제적으로 경제 교과서로 말하자면 가장 인정받고 있는 그레고리 맨큐(Gregory Mankiw)의 사례를 한번 봅시다. 그의 홈페이지의 연구업적(paper)란을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이거 누구처럼 자기 학교 동인지에다 낸 논문들이 아닙니다. <American Economic Review>,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같은 전 세계 수백여개 경제학술지 중에서 TOP5 에 들어가는 학술지 논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맨큐의 BIO 를 봐도 이런 학술지에 논문 실린 것들을 상당히 영예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경제학자들의 업적을 평가하는 한 프로젝트에 따르면, 맨큐의 연구 업적은 2011년 11월 기준으로 TOP 5% 들어가고, 전 세계 3만명 경제학자들의 연구 업적 중에서도 24위에 랭크되면서 노벨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Gary S. Becker)에도 앞서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제 교과서를 썼다고 평가받는 사람도 저 정도 객관적 연구업적(논문)을 내야 교수직 유지할 수 있는게 미국이란 나라인데, 주관적 평가는 무슨 얼어죽을 주관적 평가입니까?
얼핏 주관적일 수밖에 없겠다 싶은 것도 어떻게 해서든 계량화하고 조작화해서 객관적으로 만드는게 바로 학문이요 과학이라는 것인데, 그런 일을 업으로 하는 학자가 지네들 업적 평가를 주관적으로 한다? 그것도 세계 학문을 선도한다는 미국이란 나라가?
허, 참! 미국을 무슨 알로 보는 것인지 뭔지.
이준구 교수 제자들이 참 불쌍합니다.
뭐, 이준구 교수야 어차피 낡아빠지고 허술한 세대라서 그런 초라한 경력 갖고도 "교수" 자리 잡는게 어렵지 않았고, 논문 아닌 비평이나 대충 쓰고도 "석학" 소리 듣는게 어렵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이준구 교수 제자 세대들은 다릅니다. 이제는 하바드 박사를 따고 와도 시간강사부터 시작이고, SCI급 논문 한두편 정도로는 어디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고 할 정도예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점점 능력주의가 제대로 잡힌다면 이런 분위기는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조만간 한국인 경제학자도 세계 경제학자 TOP 10 에 들어갈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런 날이 머지 않았음에도 전도유망한 경제학도가 자칫 이준구 교수같은 허당을 멘토로 삼아 커리어를 만들면, 노량진 행정고시 경제학 강사 밖에는 될게 없다는 것을 누가 이교수 제자들에게 꼭 좀 알려주기 바랍니다.
"전문적인 수학자가 수학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울함 경험이다. 수학자의 기능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정리를 증명하면서 수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지, 자신이나 다른 수학자들이 이루어놓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가 정치평론가를 경멸하고 화가가 미술평론가를 경멸하듯, 생리학자, 물리학자, 혹은 수학자도 보통 이와 비슷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 자질구레한 평론가에게 쏟아지는 비난보다 더 심오한, 혹은 전반적으로 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비난은 없다. 해설이나, 비평이나, 감상은 2류들이 하는 일이다."
- 고드프레이 해럴드 하디(Godfrey Harold Hardy), <어느 수학자의 변명 A Mathematician's Apology)>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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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군 |
11-12-11 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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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큐도 2008년 이전까지 폴 크루구맨 (만?)에게
"이것봐라 나는 학생들이 평가하는 지표에서 무려 10등이며 너 (=크루그만)보다 짱임"이라고 했다가
2008년에 폴 크루그만이 노벨상 받으면서 깨갱 했다는 슬픈 소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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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군/
저기 순위평가를 보니까 맨큐는 24위, 크루그만은 15위네요. 3만명내의 순위인데, 어차피 이정도 급에서라면 순위 싸움이 큰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학자들이 학술적 업적도 우수한 미국이란 나라가 참 부럽습니다. 대중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학자들은 하나같이 학술적 업적은 깡통인 우리나라와는 참으로 대조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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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는 과연 제자들 성적은 어떻게 매길까요? 인간성을 보구서? 아님 사회 정의감을 보구서? 설마 제자들 성적 매기는데 객관적 지표가 없다고 하진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런 지표로 보면 지는 몇점인가 계량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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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입니다만 한가지만 바꾸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어려워서 당대의 사람이 이해를 못했고
또 그래서 그걸 제외하고 노벨상을 줬다느니 하는건 루머로 알고 있습니다.
물리에 정통하지는 못하지만 상대성이론은 대학교 전공수준에서 가르치고 이해하는 것으로 압니다.
제 생각엔 양자역학이 더 적합한 예시일 것 같아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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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학생/
네. 아서 에딩턴의 일화에서 가져온 얘기인데, 설마 세명밖에 이해못했다는 말은 과장이겠죠? ^^;;;;
뉴턴의 미적분도 초기에는 당대 전문 수학자들이라도 이게 뭔 소리야 하면서 빨리 개념을 잡기가 어려웠겠지요. 지금이야 잘 다듬어져서 중등과정에서도 배우긴 하지만 말입니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관련 수학이 너무나 어려웠다기 보다는(물론 실제로 '텐서 미분'이라고 하는 초창기 일반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표현 방식은 너무나 복잡한 것이었다고 하긴 합니다), 당시 학자들로서는 무슨 빛이 휘고 시공간이 굽어지고해대는 결과를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을지 않을까 합니다.
믿은 사람(아서 에딩턴)이 결국 대박을 쳤지요. ^^
p.s :
본문과 코멘트에서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이야기가 섞여버렸는데,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본질과는 상관없으니 그러려니 생각해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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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학시절 이준구 이창용 공저인 '경제학원론'으로 개론 수업을 들었는데, 개론 교과서를 가지고 학자가 잘 썼니 못 썼니, 이런 논의가 가능한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경제학원론 교과서야 누가 쓰든. 수요, 공급, 상품, 거시, 황폐 등등 뻔하거든요. 경제학원론 책이 한두 권도 아니고, 그냥 교수들마다 알아서 선택하고, 학생들도 참고로 읽는 거지요.
미학과에서도 미학개론이 있고, 인류학과에서도 인류학개론이 있고, 정치학과에서도 정치학개론이 있습니다. 이들 학과에서 개론 교과서 썼다고 이토록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인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이준구, 이창용 교수 공저의 경제학원론 목차입니다. 여기에 무슨 학자의 독창적 사고와 경제학 주권이 있는지 보십시오. 그냥 똑같습니다.
제1편 경제학의 기초
제1장 경제학이란?
제2장 경제학 연구의 방법
제3장 수요, 공급 그리고 시장의 균형
제2편 소비자이론
제4장 소비자의 선택
제3편 생산자이론
제5장 기업과 생산기술
제6장 생산비용과 이윤극대화
제4편 상품시장과 경쟁
제7장 완전경쟁시장
제8장 독점시장
제9장 독점경쟁시장과 과점시장
제10장 게임과 전략
제5편 생산요소시장과 소득분배
제11장 생산요소의 가격과 고용량
제12장 노동시장과 임금
제13장 자본시장과 이자, 그리고 이윤
제14장 소득분배의 현실
제6편 미시경제이론의 여러 문제
제15장 정보경제이론
제16장 시장과 정부
제17장 공공정책의 여러 문제
제18장 금융시장의 이론
제19장 행태경제이론 : 경제학의 뉴프론티어
제7편 거시경제이론 입문
제20장 거시경제이론의 기초
제21장 거시경제변수의 정의와 측정
제8편 국민소득의 결정
제22장 소비이론
제23장 투자, 정부지출, 순수출
제24장 소득-지출분석과 승수효과
제25장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
제26장 국민소득과 물가: 총수요-총공급모형
제9편 화폐와 국민경제
제27장 화폐시장과 이자율
제28장 총수요-총공급모형과 화폐시장
제29장 은행제도와 화폐공급
제10편 경제안정정책의 이론
제30장 경제안정정책을 둘러싼 논쟁
제11편 실업과 인플레이션
제31장 실 업
제32장 인플레이션
제12편 경제성장의 문제
제33장 경제성장과 발전
제13편 국제경제
제34장 국제무역이론
제35장 무역의 규제
제36장 환 율
제37장 개방경제하의 총수요-총공급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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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라는 것이 결국 좋은 논문들을 토대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논문 안 쓴 것에 대한 이준구의 변명이 안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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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대 제자들에겐 존경받는 분이고, 또 본인 스스로 좋은 논문보다 학생들 교육에 치중하는 학자라고 얘기하는것 까진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저 댓글은 좀 충격적이네요. "몇명이나 읽는다고 생각해? 그 논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지성인이 할 얘기는 좀 아닌 듯. 영화도 블록버스터만 보실 스타일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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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자연과학쪽에서도 일반화학에서는 옥스토비(David W.Oxtoby)의 <Principles of Modern Chemistry>, 일반물리학에서 할리데이(David Halliday)의 <Fundamentals of Physics)>라고 해서 정평이 난 학부 교과서들이 다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 교과서 집필자들이 호평받는 교과서를 썼다는 이유로 해당 학문의 "석학"으로 불린다는 얘긴 못들어봤습니다. 원래 자연과학계에서는 '교과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과서에도 반영될 수 있는 논문'을 쓰는 것을 진짜 영예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오래전부터 정립되어있지요.
상식적으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해당 학문을 발전시키는 일'(논문 쓰기)과 '이미 제시된 아이디어들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일'(교과서 쓰기) 중에서 어느 쪽이 난이도가 더 높고 또 가치가 있는 일이냐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문외한이 봐선 얼핏 다 똑같아 보이는 학술적 업적이라도 다 레벨이 있는거지요. 우리나라 경제학계가 이준구 교수처럼 진정한 학문적 기여가 뭔지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을 "석학"이라고 칭하는 한, 경제학 관련 국제적 리서치 프론티어에서 발언권은 그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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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느/
아래는 맨큐의 <경제학> 목차입니다. 이준구 교수의 책은 이와 비교 어떤 차별화가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딱봐도 전반적인 개념이나 아이디어 수준에서는 다 똑같은 내용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차이라면 맨큐는 일반 경제학 교과서에도 어쩌면 기꺼이 지 업적을 담을 수도 있겠지만, 이준구 교수는 사실상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
* * *
맨큐의 경제학
제1부 서론
1장 경제학의 10대 기본원리
2장 경제학자처럼 생각하기
3장 상호의존관계와 교역의 이득
제2부 시장의 작동원리
4장 시장의 수요와 공급
5장 탄력성과 그 응용
6장 수요, 공급과 정부정책
제3부 시장과 경제적 후생
7장 소비자, 생산자, 시장의 효율성
8장 응용: 조세의 경제적 비용
9장 응용: 국제무역
제4부 공공경제학
10장 외부효과
11장 공공재와 공유자원
12장 조세제도
제5부 기업행동과 산업조직
13장 생산비용
14장 경쟁시장
15장 독점
16장 과점
17장 독점적 경쟁
제6부 노동시장의 경제학
18장 생산요소시장
19장 임금소득과 차별
20장 소득불평등과 빈곤
제7부 소비자 선택 이론과 미시경제학의 새로운 영역
21장 소비자 선택 이론
22장 미시경제학의 새로운 영역
제8부 거시경제 데이터
23장 국민소득의 측정
24장 생계비의 측정
제9부 장기 실물경제
25장 생산과 성장
26장 저축, 투자와 금융제도
27장 재무이론의 기초
28장 실업
제10부 화폐와 물가의 장기적 관계
29장 통화제도
30장 통화량 증가와 인플레이션
제11부 개방경제의 거시경제학
31장 개방경제의 거시경제학: 기본개념
32장 개방경제의 거시경제 이론
제12부 단기 경기변동
33장 총수요와 총공급
34장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이 총수요에 미치는 효과
35장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상충관계
제13부 책 말미에
36장 거시경제에 관한 다섯가지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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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잡이 |
11-12-12 2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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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세계적 명문 프린스턴 대학 박사에, 동 교 방문학자(?)도 최근에 다녀오신 분이 국내에 있으면서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어리숙한 제자들 데리고 실상을 저렇게 오도하시면 안되죠. 낯간지럽게.
미국 학계의 경우 이준구 교수나 안철수 교수 처럼 논문은 안쓰지만 사회적으로 유명한 분들이 교과서를 쓰는 게 아니고, 논문쓰는 업적이 일정 경지에 오른 대가들이 교과서를 쓰는 경우가 더 흔하죠. 즉 연구하고 논문쓰는 대가라면 다 교과서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교과서를 쓰려고 마음 먹으려면 어느정도 학문적 업적을 쌓고 난 다음에 실행한다는 거죠. 물론 미국이라고 유명하지 않은, 학문적 업적이 일천한 학자 중에 교과서를 쓴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요. 교과서라는게 각론 별로 들어가면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준구, 정운찬 교수가 쓴 원론/미시/거시 경제학 쯤 되는 메이저 교과서라면 대부분 왕년에 리서치 꽤나 했던 양반들이 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연구중심 대학의 사회과학 전공이라면 (인문학은 모르겠음), 교과서를 아무리 맨큐 처럼 베스트 셀러를 만들어도 논문을 쓰지 않고는 버텨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왕년에 명문대에 있으면서 한 리서치 했던 대가가 교과서를 썼다가 베스트 셀러가 되고는,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떨어지는 대학으로 옮겨서 교과서만 업데이트 하면서 교과서 판매 로얄티 받으면서 편하게 사는 교수들도 많습니다. 이 분들이 원래 있었던 명문대에 있기 싫어서 뛰쳐 나온게 아니죠. 누가 이준구 교수 처럼 메이저 저널에 제대로 된 논문 하나 게재한 적 없이 교과서 쓴 미국 명문 대학 교수 있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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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잡이 |
11-12-12 2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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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터넷도 없고, 박봉에 통나물 강의실 강의 부담 때문에 연구나 저술의 환경이 열악했던 시대를 지내신 분들이라, 그래도 우리말로 번역/요약해서 지식을 전수하신 그 분들의 훌륭했던 업적을 완전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도 그 옛날의 잦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법.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제약 때문에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인정하면 될 일을 가지고, 저 분 처럼 진실을 호도 하면 안될 것 같네요. 곧 정년을 채우고, 학교 밖으로 나가 소일거리 하실 분을 모시고 멘터 삼는 젊은이들이 한심하고 불쌍할 뿐이고요. 물론 똑똑하고 당돌한 20대 대학생 쯤 되었다면 그 정도는 걸러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한다면 원래가 자격이 없는 애들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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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잡이 |
11-12-12 2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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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지난 주 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이헌재씨의 회고록을 보면 이헌재씨는 베스트셀러 저자 정운찬 교수가 '한국 유일한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봤다고 쓰더군요. 이헌재씨 만큼 파워를 휘둘렀던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층의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서울대 학부생이나 더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 수준이야 뭐..
[정운찬(63)=전 국무총리, 현 동반성장위원장. 경기고 4년 후배로 서울대 교수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왔다. 나는 그를 ‘한국 유일한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봤다. 그에게 “현실 문제에 참여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406/6846406.html?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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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의 실력을 따지지 않더라도 어디 맨큐 책하고 이준구 책하고 비교를 합니까. 목차는 비슷하고 겉 내용은 비슷한 듯 해도 서술방식, 핵심을 집어내는 능력, 알기쉬운 사례 등 실제 내용은 확연히 다릅니다. 서울대 학생들이 안된 것이 그 대학 교수들이 쓴 교재로 공부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국내 교재가 없을 때는 새무엘슨 경제학 등의 원서를 사용했었는데 조순씨 이후로 국내교재를 사용하게 되었지요. 원서를 국내교재로 바꾼 것이 발전이고 기여라고 할 수 있나요? 외국 교재 몇 개 잡탕으로 버무려 놓은 국내교재를 쓴 저자들 돈벌이에 학생들이 동원되는 것 뿐이지요. 요즘 좋은 원서들 널려있는데다 International Edition으로도 발간이 되어서 책 값도 쌉니다. 원서 발간과 동시에 번역서가 등장하는 것이 애로사항이기는 하지만 허접한 국내교재를 쓸 이유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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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의 경제학 원론이 좋은 교과서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긴 했는데, 실지 객관적인 평가는 무엇이건간에, 까놓고 말해서 과연 그런 호평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경제학 교과서를 일일이 비교분석은 해봤는지 또 경제학은 어찌어찌 공부해야 맞는 것이다고 할 깜냥이나 되는지 생각해보면, 이건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위의 칼잡이님 전언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헌재씨같은 사람조차 정운찬씨를 두고 '한국 유일한 노벨 경제학상 후보'라고 하는 상황이 아닙니까. 이교수의 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쏟아지는 호평들도 대략 그런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이 판치는 상황에서는 나오는 얘기들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영어학과 수학의 업적이요 세계 최고 영어, 수학 교과서다고 생각할 고등학생도 아마 많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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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mahlerian 님이 생각할 때, 어떤 교수 밑에서 공부해야 학생들이 안 불쌍할까요? 정운찬?
님이 쓰신 모든 내용은, 우리나라 거의 모든 교수들에게 해당되는 글입니다. 특별히 이준구만 두드러진다고 생각되지 않네요
그리구, 이준구는 경제학을 인문학으로 보는 학자지요, 금융공학같은 비인간적이고, 극단적으로 전문화한 학문이 미국금융사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학자입니다.
그러니, 요즘 경제학논문의 90% 이루는, 그 돈놀이로서 경제학이, 곱게 보이지 않았겠죠
또한, 반대급부로 경제도 사람이 하는거다. 그래서, 그 사람의 통찰을 도와주는 책이 본인이 쓴 교과서다.
이정도 스텐스와 자뻑은 누구나 다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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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중에서 연구업적 거의 없으면서 정치니 사교니 하는데 제일 눈돌린 학자로 회자되어온 사람이 정운찬 교수였습니다. 저번에 총리 임명 시에도 그때문에 말이 많았죠. 충격적인 것은, 이준구 교수는 그런 정운찬 교수보다도 연구업적이 더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정말 놀랐던 사실이지요.
에티카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차피 3류 소굴 속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2.9류 이상은 안되는 법이지요. 설마 그 나이또래 경제학과 교수 중에서 이준구 교수만 문제가 있을리는 없겠습니다. 다만, 저도 이준구 교수가 무슨 석학이라도 되는 양 조명을 받고 또 이런저런 사회적 발언들이 영향력이 별로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그를 깍아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어떤 영향력(권력)이란 반드시 그에 걸맞는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영향력이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불문입니다. 아래 기사 한번 보십시오.
"서울대 아니어도 된다 생각했더니 수능만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406987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 교수에게 경제학 관련 질문을 하는가 하면 이 교수의 책리뷰를 보고 같은 책을 구입해 정독하는 수험생답지 않은 '배짱'도 보였다."
이준구 교수는 저렇게 입시생들에게까지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하나의 '모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서울대학교"라는 브랜드는 진리와 거의 동의어로 취급받고 있는 상황이지요.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젊은 학생들에게 도대체 진짜 학자란 무엇이고 경제학이란 무엇인지 호도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또한 이교수의 설익은 주장들이 그대로 언론을 타게되면서 정치적 혼란은 물론이고 대중들이 경제학의 기능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촌부는 할 수 있는 잘못이라도, 대통령이 하면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이준구 교수같은 수준이하 교수들이 널린 것이야 저도 잘 알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최고 경제학부 교수"로서 저런 사람은 이제 퇴출시키는게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서울대 경제학과가 이준구 교수랑 정운찬 교수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미지가 다 망가진 것이지, 알고보면 젊은 교수들 중에서 훌륭한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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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덧붙여, 이준구 교수가 경제학을 인문학으로 보고 있다니 그건 저도 금시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수는 김수행이니 장하준이니 하는 그야말로 인문학적 경제학을 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과는 많이 다르거든요. 논문지도능력까지는 갖췄는지 안갖췄는지를 떠나서, 적어도 이준구 교수는 과학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주류 경제학의 코스를 밟기는 한 사람입니다. 이준구 교수 지부터가 미국 자본주의 사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제자들에게도 적어도 수업시간엔 그 내용을 고대로 가르치고 있는 사람인데, 경제학은 인문학이고 금융공학은 비인간적이며 경제학 논문의 90%가 돈놀이 경제학에 불과하다고 그런다? 뭐, 워낙 위선에 둔감한 사람이니만큼 이교수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닐 개연성은 있을것입니다. 그래도 본인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리서치 프론티어에 참여를 못하고 있다는 소리는 안하네요. 이준구 교수의 교과서에는 "행태경제이론 : 경제학의 뉴프론티어"라는 장이 있습니다. 행태경제이론에 그렇게 격찬을 하시는데 행태경제이론은 주류경제학이 아님 뭔지, 또 지는 행태경제이론의 발전에 어떤 기여라도 있는지 참 궁금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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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 "타인을 읽는다" 라는 뜻이죠
행태경제이론이 사람의 행태를 연구한다는 거죠. 인문학과 관계가 깊을 듯 보이네요, 게임이론 확장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준구가 관심을 가질만 합니다. 실적이 있는지 없는지야 모르지만,
그리고, 주장과 감정이 막 섞여서 쓰니까, 우선, 그것을 걸러내는 작업이 더 힘드네요
금시초문 이다, 이런 주장을 하셨으면, 근거를 대셔야죠, 장하준 언급은 비난같고, 주류경제학을 공부하면 경제학을 인문학으로 보면 안된다는 주장이신가요? 근거가 뭐죠?
이준구가 배울때는 케인즈가 유력했겠죠, 그리고, 통화론자든 케인즈든, 그중 어떤 학파생각에 타당성을 더 두느냐와 미국자본주의를 가르치면 안된다가 양립할 수 있는 질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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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행태경제이론은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현대 인지과학(심리학)의 성과들을 경제학에 도입한 것입니다. 인문학과는 관계 없습니다.
현대 주류 경제학은 과학적 방법론을 유일한 진리 추구 방법론으로 받아들이는 과학의 한 분파입니다(적어도 그렇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주류 경제학은 과학적 방법론조차 다양한 학적 접근법이나 이데올로기의 하나로만 파악하는 인문학의 한 분파입니다. 과학과 인문학처럼, 현대의학과 한의학처럼, 주류경제학과 비주류경제학 사이에서는 화해와 소통이 불가능한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케인즈주의니 통화주의니 하는 것은 다 어디까지나 주류 경제학 내의 학파들입니다. 생물학에서도 집단선택론자 유전자선택론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암튼 학파가 어느쪽이건 과학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이런저런 경제학 이론들과 관련 상당히 높은 수준의 '합의'를 잘 이뤄내고 있습니다. 각 학파간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인문학계와, 적어도 학파간에는 소통이 가능한 과학계는 학문적 발전 가능성 등 여러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장하준의 위상이 어떻다, 주류 경제학이 저떻다 하는건 이 게시판에서 많이 논의된 일입니다. 검색으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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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주류경제학과 비주류경제학을 나누는 기준이 "과학적 방법론"의 수용 여부다? 사이몬 논쟁은 30년 전에 끝났죠, 가치를 배제한 사실로서의 과학은 판타지입니다. 한마디로 말장난이죠, 과학을 배제한 학문이 어떻게 가능하며, 가치를 배제한 학문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님처럼 상대방을 비난할 목적으로나 구분가능한 판타지죠
이준구는 케인즈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님은 마치 케인즈에 가까운 사람은 학생들을 가르치면 안된다는 뉘앙스잖아요. 이준구보다 더 좌파적인 생각의 주류경제학자(?) 미국에 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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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사이몬 논쟁이 무슨 말인가요?
에티카님. 저는 무슨 주류경제학이냐 비주류경제학이냐 하는 문제는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근거중심의학의 권위자 중 한사람인 에드짜르트 에른스트(Edzard Ernst)라는 사람은 이른바 대체의학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이리 답한바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대체의학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 효과가 있는 의학 또는 효과가 없는 의학, 그리고 안전한 의학 또는 안전하지 못한 의학만이 있을 뿐이다. 소위 대체의학적 치료법들은 과학적 평가를 거쳐서 좋은 의학 또는 가짜 의학으로 분류가 되어야 한다. 미래에는 근거가 있는 의학은 모두 현대의학 속으로 편입이 되고, 근거가 없는 가짜 의학은 버림받게 된다면 좋겠다.”
현대의학과 대체의학 사이의 관계가 정확히 주류 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하심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주류경제학이나 비주류경제학을 나누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입니다. 맞는 이론과 틀린 이론, 개연성이 더 있는 이론과 개연성이 덜 있는 이론이 있을뿐이지 주류와 비주류가 어디 있나요? 비주류 경제학같은 것은 없어요. 그건 그냥 대체로 틀린 이론이거나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론의 집합체들입니다.
그리고, '가치(당파적 이상)'를 배제한 학문이 과연 가능할는지는 저도 모르지만, 그것을 배제하는 것은 본디 객관성과 과학을 추구해야할 학문의 이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학문에 '가치'의 추구가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사실상 아무 '가치'가 배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물리학 방정식들의 도움으로 우리 문명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한번 자문해보시길 바랍니다. 반대로 학문에 '가치'를 부여해서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학살한 예는 라이센코 생물학처럼 숱합니다.
저는 이준구 교수가 그래도 주류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이준구 교수같은 사람이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 안된다고 보는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 그가 케인즈주의자고 통화주의자고, 반이명박이고 친이명박이고간에 일단 실력이 도무지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이준구 교수는 암만 보더래도 논문도 제대로 못쓰고 논문지도능력도 있는지 의심가는 사람이며, 단지 내수용 고시생 경제교과서 하나 쓰고 그걸로 평생 우려먹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미국에 이교수보다 더 좌파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주류 경제학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건 이준구 교수는 본문에 소개한 3만명의 경제학자들 업적 순위로 보면 3만등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등록은 되었다면). 이런 사람이 언제까지 국가를 대표하는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둘째,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서울대 경제학과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경제학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에 대해서도 큰 혼선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준구 교수가 4대강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랑 무상급식이 가치재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학계에서 정립된 이야기들이 아니고 전부 이 교수 혼자 스턴트에 불과합니다. 학자가 무슨 주장을 하려면 일단 학술세미나나 논문이라는 소통경로를 사용하는게 정석이고, 어쩌다가 대중연단에 서게된다면 어디까지나 정말 그 바닥에서 학술적으로 잘 합의된 얘기만 하는 것이 정도입니다. 단순히 논란을 일으켜서 문제라는게 아니라(맞는 얘기를 해도 논란이 벌어지는 경우는 있으므로), 소속 학교나 전공 학문의 신뢰성에 장단기로 금이 가게 하는 허술한 얘기를 계속 하는 사람에게 국민세금이 나가선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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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반복을 통해 저를 지치게 만들려는 건가요?
비주류경제학자 =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론
비주류경제학자 = 장하준
두 문장은 인과관계가 연결이 안되는 문장이죠, "비주류경제학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다르죠
각자 따로 따로 증명해야 합니다. 이런걸 전문용어로 "뭉갠다"고 하죠
사이몬 논쟁은 님이 지금 하고 있는 얘기를 미국에서 예전에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결국은 말장난이죠. 한때는 이성이, 한때는 감성이, 한때는 가치가, 한때는 과학이, 등 번갈아 가며, 그 중요성이 더해지고 덜해지고 하는거죠
실력이 형편없다? 님생각이죠
논문지도능력없다? 님생각이죠
3만등이다.? 님생각이죠
불필요하다? 님생각이죠
귄위를 실추시키다? 님생각이죠
혼선을 준다? 님생각이죠
학계에서 정립되다? 님생각이죠
논문이라는 소통경로를 사용? 님생각이죠
학문적으로 합의된? 님생각이죠
이런 얘기는 반드시 근거가 필요하죠. 없으면 글이 굉장히 싸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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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제 얘기가 뭉개는 얘기라고 하신다면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에티카님이 요구하시는 근본적으로 뭉개지 않는 수준의 증명을 하려면 무슨 주장을 해도 책을 하나씩 써야할 판인데, 앓느니 그냥 죽고 말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들이댄 근거로도 장하준 교수나 이준구 교수의 학자적 위상이 어떻다는건 어지간한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알아서 다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더 복잡한 증명까지 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슨 장하준 교수나 이준구 교수로부터 "나는 실력이 없는 학자다"라는 자백이라도 받아와야 할까요? 뭐 두 사람을 대단한 학자로 생각한다면, 에티카님의 생각은 생각대로 존중해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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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
11-12-13 2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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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인문학과 과학에 관한 말러리안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준구 교수의 '실력'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대학 교수는 교육자인 동시에 연구자이고 연구자의 실력은 논문이나 연구 논저로 검증됩니다. 교과서 집필로는 교육자의 실력은 측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연구자의 실력을 검증하는 데는 털끝만큼의 가치도 없습니다. 서울대 교수라고 해서 교육 중심의 경력을 쌓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독창적 연구 업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성과가 없는 이상, 자신이 학자가 아님은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대학 교수의 업무가 교육과 연구 두 가지인 이상 어느 한쪽에 더 중점을 둔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육에 중점을 두겠다고 결심하면 학자로서의 권위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준구 교수의 발언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가 별 근거가 없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준구 교수는 발언하는 이슈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준구 교수가 교육자로서 경제학을 학생들에게 잘 가르치는 것과 이준구 교수가 경제학을 사회 문제에 응용하는 데 연구 업적을 인정받는 전문가라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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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3 2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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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가 말한 "그런 저널(세계 최고의 저널이 그런 저널이군요)에 실린", "알고 보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읽는", "세상을 바꾸기에는 어림도 없는", "세상에 임팩트를 준 것들이 고작 셀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한" 논문들이 바로 교과서를 쓰는데 기초가 되는 논문들입니다. "많은 경제학도들에게 빛을 줄 수 있는 교과서"는 그런 논문들이 없이 쓰여질 수 없는 일이지요. 교과서는 창작이 아니라 종합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교과서란 책 한 권 읽고나면 고시문제 푸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도록 해 주는 책이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의 다양한 이론을 큰 틀 안에서 종합하고 충분한 citation을 통해 읽는 이들이 궁금증이 생기면 관련된 논문을 추적해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놓은 겁니다. 즉, 교과서란 그저 길잡이일 뿐인 거지요. 그런 까닭에 유수의 저널에 출판된 논문을 폄하하는 사람이 훌륭한 교과서를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대로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교과서는 그저 길잡이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교과서와 함께 논문들을 읽지요. 외국의 훌륭한 교수들 syllabus에는 reading list가 빡빡하게 들어가 있지요. "많은 경제학도들에게 빛을 주는 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교과서에 인용되어 있는 논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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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잡이 |
11-12-13 2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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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한마디 거드시기 불편하실 줄 알아서 기대 안했는데 훌륭한 리플 남겨주셨네요. 훌륭한 교과서에 대한 무소의 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
골방에 앉아서 어리버리한 애들 앉혀 놓고 Peer-review process of scientific communication의 가치를 일거에 폄하 하고 계신 이준구 훈장님은 그래도 유행에는 민감하신지 요즘은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에 나름 심취하셔서 최근에는 행동경제학 '교과서'도 쓰셨던 것 같더군요. 그 옛날에 학위 하시고 원론하고 미시 교과서 개정에만 열정을 다 받쳐오신 분께서 행동경제학 연구는 언제 다 follow-up을 해서 교과서 까지 다 쓰실 내공에 이르셨다는 말인지. 논문 한편 쓴적 없는 분야에 관한 교과서를 쓰는 용기에 감탄을 해야할 지..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갖은 고초를 다 겪은 노벨 경제학자 Kahneman 과 그 전 후의 행동경제학자 들의 수십년에 걸친 설움과 피나는 노력 따위는 본인의 일필휘지의 필력에 비교도 안된다고 생각하시거나, 아니면 본인은 peer review 따위는 필요 없이 지식의 '창작'이 가능하다고 생각 하시나봐요. Scientific knowledge is cumulative and builds only on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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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잡이/
서울대 경제학부 홈페이지를 가보면 각 교수들 연구업적이 공개되어있고 이준구 교수 역시 그 대상입니다. 이교수가 행태경제학 관련해서 2008년 3월에 논문을 하나 쓰기는 했네요(최근 10년간 쓴 세편의 논문 중 하나임).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http://econ.snu.ac.kr/html/procatagory/?temp=v&idx=0026&page=1
"행태경제학의 등장과 경제학의 미래, 이준구, 2008. 3"
단, 저 논문은 <경제논집>이라고 정식학술지가 아닌 동료심사가 사실상 없는 서울대학교 학내 동인지에 발표한 것이고요. 제목만 봐도 해당 분야에 대한 기여, 아이디어가 담긴 정식 '논문'이라기 보다는 그냥 그 분야에 대한 교과서 수준의 '해설' 내지는 '비평'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준구 교수가 행태경제학을 다뤘다는 경제학 교양서는 바로 <36.5℃ 인간의 경제학>라는 이름으로 얼마전 출판된 바 있습니다. 저 논문(?)은 이 책 내기전에 숨고르기용이 아니었던가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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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4 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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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잡이/ 불편하기는요, 뭐. 이준구 교수가 쓴 글을 읽자니 읽는 제가 다 낯이 뜨거워지는데 쓰시는 본인은 얼마나 민망했을까, 저 글을 쓰고 나서 후배이자 제자들인,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올라있는 젊은 교수들 볼 낯이 없어서 숨어다니지 않았을까 염려가 되기도 하더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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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을 많이 쓴 학자가 교과서를 더 잘쓴다는 건 아닌 듯합니다. 물론 교과서도 교과서 나름이겠지만, 최소한 개론 교과서는 아니란 거지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개론을 다른 물리학자보다 더 잘 쓸 가능성은 없겠지요.
교과서 잘쓰는 사람과 연구논문 잘 쓰는 사람 분명히 따로 있을 겁니다. 그럼 결국 대학교수나 학자의 본업이 과연 교과서 쓰는 거냐 연구논문 쓰는 거냐, 이 문제겠지요.
이건 논쟁의 여지도 없습니다. 교과서야 하나 써놓으면 10이고 20년이고 개정판 내서 버티면 되지만, 논문은 계속 써서 검증받아야 합니다. 이준구 교수야 30년 재직 기간 중 학진 등재 논문 단 두 편밖에 안 쓴 인물이니, 논문에 대한 검증이 무언지 모르는 분이겠지요.
제가 대학시절 바로 이준구 교수의 교과서로 경제학개론 수업을 들었는데, 강사로는 같은 서울대 경제학과 이근 교수였습니다. 이분 학진 등재 기준 논문 30편, 외국전문저널 논문 30편, 외국일반저널 논문 80편, 전체 논문 240편 썼더군요. 이분 전공은 중국 경제학과 통일경제학입니다.
이준구 교수의 교과서는 전혀 기억에 안 남았으나, 학생들이 어떤 질문을 하든 척척 대답하던 이근 교수는 워낙 기억에 남아 제가 졸업하고도 자주 찾아뵈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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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lerian님/*궁금한 것이 있어요.
빅뉴스가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 먼저 있고 나중에 이준구교수가 반박을 했네요. 반박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은 없구요. 중요한 팩트문제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요. 10년간 KCI기준 논문 한 편이라도 발표를 했느냐 (이준구교수 - 했다,빅뉴스 -안했다.)여부인데 어느쪽이 맞는지요?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지 여부를 확인해주실수 혹시 있나요?
*인용글
박원순 지지 앞장선 이준구 교수, 안경환 교수 10년 간 KCI 기준 논문 한 편도 발표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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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교수와 함께 강남좌파를 선언하면서 자신의 전공인 재정학과 전혀 관계없는 운하 반대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는 2001년도 이후 국내 전문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전무하다. 무려 10년째 연구 성과를 내지 않으면서 정치투쟁에 골몰하는 것이다. 물론 이준구 교수도 조국 교수와 마찬가지로 단 한 편의 국제전문학술지 논문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4002
논란이 된 글에서 변 대표는 "이 교수는 2001년 이후 국내 전문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전무하다"며 "무려 10년째 연구 성과를 내지 않으면서 정치투쟁에 골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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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 대해선 "내가 지난 10년 동안 논문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그가 어디서 그런 기록을 봤는지 몰라도 이건 명백한 명예훼손 감"이라고 주장했다.
http://media.daum.net/economic/employ/view.html?cateid=1040&newsid=20111020134813410&p=moneytoday
*내 생각
앞서의 것은 빅뉴스의 글이고 뒤에 것은 이준구교수의 반박입니다.2001년도 이후 국내학술지에 등재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빅뉴스가 조사한 후 쓴 글인데 명백한 명예훼손 감이라니 어리둥절 하군요.
http://www.kci.go.kr/
위의 사이트에서 조사하고 방문 후 확인도 받았겠지요? 그외에 다른 곳에서도 교차체크를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빅뉴스의 기자정신을 볼 때 그렇지 않을 리가 없을 것 입니다.
명예훼손을 논하기 전에 이렇게 확인한 내용이 틀리다면 논문을 보여주면 그만일 것이고 명예훼손 운운하는 것은 공인으로서 할 자세는 아닌 듯 합니다. 특정인을 망신주기위해서 빅뉴스가 이런류의 폭로성격의 기사를 썼다기보다 연구의 객관적인 실체인 논문을 교수들이 쓰지 않더라라는 점을 알려 전반적으로 연구분위기를 높히기 위한 공익적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가사 빅뉴스의 조사가 미흡하다고 애써 인정한다고 할 지라도 본인의 자백을 볼 때 논문을 많이 쓴 것은 아니라고 보여지며 이는 본인이 반성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연구하겠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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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하는사람/
<빅뉴스>는 "이준구 교수는 2001년도 이후 국내 전문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전무하다"고 보도했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준구 교수는 동문서답을 하면서 지난 10년간 <경제논집>이라고 전문학술지가 아닌 학교 동인지에 논문(?) 세편 낸 엉뚱한 사실을 말하면서 "명예훼손감" 운운하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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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lerian님/"10년간 학진 등재 논문없다 공격했던 한겨레"라는 제목으로 이미 읽어보았던 내용입니다. "한겨레신문은 이 교수가 <경제논집>에 ‘행태경제학의 등장과 경제학의 미래’(2008. 3) ‘행복의 경제학: 정책적 함의’ (2005. 6), ‘비용-편익분석의 이론과 현실 : 새만금사업의 사례’ (2001. 1) 등 세 편의 논문을 지난 10년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지요? ^^
그런데 이준구교수의 명백한 명예훼손운운 발언의 글에서는 "그냥 아니다"라는 내용만 보이고요.
전문학술지와 학교 동인지랑 구별이 되는데 왜 이준구교수는 명백한 명예훼손 운운 했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이준구교수의 해명을 더 듣고 싶습니다.빅뉴스의 글은 전문학술지 논문을 등재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있고 이는 하나의 의견으로 존중 받아야할 것으로 봅니다. 이준구교수가 쓴 교과서에 대한 평가는 별론으로 해야겠지요.
궁금한 점이 하나 더 있어요. 한겨레신문의 원문글을 보고 싶어요. 이준구교수의 논문 세편이 있다고 빅뉴스에서 한겨레신문을 인용하여 글을 썼는데 제가 잘 못 찾겠네요. 반박의 이준구교수의 글만을 볼 때 놀라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원문을 알려주신다면 님이 말씀하신 동문서답이라는 견해에 대해 원문을 읽고 제 견해를 표명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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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하는사람/ 복잡할 것 하나도 없는데요. 빅뉴스는 이준구 교수가 2001년 이후 KCI급 논문을 한번도 발표하지 않았다고 보도한 것이고, 이준구 교수와 한겨레신문은 10년 간 서울대 경제논집에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고 주장한 거지요. 이 경제논고는 학진에 등재되지 않은 잡지입니다.
학술논문검색 사이트에서 저도 이를 일찌감치 확인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대 법대 조국, 안경환, 한인섭 교수, 고려대 법대 김인겸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 이근 교수 등을 평가할 때 모두 KCI급이나 SSCI급 논문만 대상으로 했는데, 유독 이준구 교수만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는 거지요.
이준구 교수는 2001년 이후 단 한 편의 KCI급 논문을 발표한 바 없고, 1984년 서울대 재직 이후 약 30년 간 KCI급 논문은 단 두편 을 썼고, 외국전문 저널에는 단 한 편의 논문도 게재한 바 없습니다. 논란의 여지없는 팩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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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교수, 김태동교수 등이 나쁜 것이 소위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정치판에 기웃거리거나 돈벌이에 급급해서 프로젝트 보고서나 쓰고 교재 쓰느라 혹은 다른 이유로 논문을 못썼으면서 (주류)경제학에 문제가 많아서 그쪽은 안쳐다봤다는 식으로 엉뚱한 핑계를 댄다는 점입니다. 아니 문제가 많으면 그 점에 주목에서 논문을 쓰고 학술지에 투고해서 동료평가를 받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사실은 딴 짓하느라 Follow-up하기가 힘들고 능력이 안돼서 손 놓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고라에서 수많은 네티즌을 감동시킨 미네르바가 대학에서 수십명 놓고 강의하는 경제학교수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김태동 교수나 소수가 읽는 세계적 학술지 게재논문보다 수많은 사람이 읽는 경제학교재가 더 뛰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준구교수나 완전 판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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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건 이준구 교수가 자기가 논문은 팽개치고 교과서 쓰기에 몰두한걸 이리 변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경제학계는 아직도 미국 경제학계에 대한 의존을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과서조차 미국 교과서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 경제학계가 계속 그런 상태에 머물고 있는 한 미국 경제학계의 식민지 신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경제학계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첫 걸음이 교과서의 독립이라고 믿었습니다. 학생들이 우리 말로 우리 경제에 대해 쓴 교과서를 읽게 되어야만 우리 경제학계의 자립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나로 하여금 경제학도들에게 빛을 던져줄 좋은 교과서를 쓰는 데 내 정열을 바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쓴 이 세 책이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책과도 당당히 겨룰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웃기는 것은 그럼 요즘 그가 관심갖고 있다는 행동경제학은 어느 나라에서 태동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준구 교수 자신이 쓴 경제학 교과서는 물론 자신이 쓴 행동경제학 교양서인 <36.5℃ 인간의 경제학>에도 역시 전부 미국 학자의 이론으로만 가득차 있단 말이죠. 근데도, 세계 어느 나라의 책과 비교해도 좋은 책? 허이구야.
이준구 교수 논리대로라면, 외국 학자들의 교과서는 "제국주의적 침탈"이요, 그 책을 그대로 번역하면 "매국노"고, 나름 짜깁기하는 수고라도 하게되면 "독립군"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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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이준구 교수가 예전에 변대표에게 항변하는 글에서는 논문과 교과서를 비교하며 또 뭐랬는지 다시 한번 감상하시길. 자기가 봤을땐 교과서가 더 중요하니 토도 달지 말랍니다.
회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
http://jkl123.com/sub5_1.htm?table=board1&st=view&page=11&id=12484&limit=&keykind=&keyword=&bo_class=
"일반적으로 교과서 쓰는 일을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해 주는 데 인색한 풍토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좋은 교과서를 쓰는 일은 논문 몇 편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 주는 임팩트라는 측면에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얻는 혜택을 생각해 보면 좋은 교과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변희재 씨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감히 이 점에 토를 달고 나선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만천하에 광고하는 결과를 빚을 뿐입니다."
이교수 영향받아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들이 좋은 논문 쓰는 일을 하찮게 여기진 않을까 정말 걱정됩니다. 저 게시물에 달린 하나도 영양가가 없는 저 코멘트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게 정말 '대학교수' 홈페이지인지 '사이비종교 교주' 홈페이지인지 알 수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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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
11-12-15 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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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가 자기 전문분야가 아닌 곳에서 전문가 행세한다는 것,
그가 자신의 빈약한 논문 실적을 변명하느라 무리수를 둔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고요.
또 각종 정치 사회 현안에 대한 이 교수의 의견에 대해 저 자신은 매우 비판적임을
밝혀두고요. 이준구 교수를 옹호하고픈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논의를 흐리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래와 같은 점은 말님이나 파비안느님과
의견을 달리합니다.
(1) 경제학과 과학(본문에서는 수학, 댓글에서는 물리학)과의 수평 비교
수학자의 증명은 수학자 사회에서 검증 가능하고 검증된 이론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물리학도 그렇겠고요.
그러나 "경제학에서는 학자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실증적 현실인식이
다를 수 있고,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정책이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할지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따옴표 안은 맨큐의 경제학
2장에서 거의 그대로 옮긴 내용입니다).
그러니 경제학에서는 수학과 달리 해설, 비평, 감상도 2류가 하는 일은 아니겠습니다.
수학, 물리학과 달리 해설, 비평, 감상은 경제학의 본질에 닿아 있습니다.
파비안느님은 아인슈타인의 예를 많이 들었는데 같은 이유로 역시 적절한 예는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이 내세운 이론들은 잘 설계된 실험으로 검증 가능하며,
이 실험 설계나 그 결과의 해석에 학자의 가치관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2) 교과서의 중요성
그런 고로, 가치관이 맞붙는 학문 분야이기 때문에 교과서가 중요합니다.
학생의 역사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역사교과서 서술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역사교과서 서술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 서술자가 대단한 학문적 권위자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어떤 역사학자가 "나는 역사 논문보다 교과서 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고 해도 저는 수긍이 갑니다. 이 경우 논문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보다 교과서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클 수 있는 거죠.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경우에도 그러하고, 위에 기술했다시피 가치관이 충돌하는 학문인
역사나 경제학 같은 분야에서는 더 그러합니다.
그러니 "논문보다 교과서가 더 중요하다"는 발언이 그 자체로 비판받을 바는 아닙니다.
폴 사무엘슨 - "내가 우리나라 경제학 교과서를 쓸 수 있다면 나는 누가 우리나라의 법을 만들든지
외국과 어떤 조약을 체결하든지 상관할 바 아니다."
그레고리 맨큐 - "경제학 교과서를 쓰는 일은 커다란 영광이면서 동시에 막중한 책임인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를 집필하는 것은 더 좋은 정부를 만들고, 미래의 번영을 추구하는
데 있어 경제학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둘 다 맨큐의 경제학 서문에 있는 내용이고 두 분 다 교과서로 유명한 분들입죠 하하하)
(3) 학자에 대한 평가
주요 학술지 게재 논문 건수로 학자의 실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분명 일종의 편의주의죠.
(언론이 그런 흐름을 주도했다는 데에 좀 자책감을 느낍니다)
그런 편의주의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이준구 교수는 남들이 명문이라고 하는 곳에서 학위를
얻어 남들이 명문이라고 하는 곳에서 교수 일을 하고 있으니 검증 작업을 두 번은 거친
셈이고, 최소한 어느 수준 이상의 학자임에 틀림없다는 논리도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좋은 학자란 게 꼭 학문적 업적을 많이 남긴 학자인가라는 근본적 의문도 듭니다.
이를테면 칼 세이건이라든가, (SF작가가 아니라 대중저술가로서의) 아이작 아시모프는
학자로서는 2류라고 해야 할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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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5 0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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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경제학계에서 교과서 저술을 연구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top journals나 field top journals에 실린 논문들보다 많이 discount를 하지요. 교과서가 중요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peer review된 의견만을 인정하는 학계의 속성상 그렇습니다. 교과서는 peer review되지 않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경제학 교육에 획을 그은 교과서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마샬이나 사무엘슨, 현재는 Mas-Colell et al.이 떠오르는군요.
훌륭한 교과서(동료 교수들에게 인정받는 교과서)를 쓰기 위해서는 해당분야 연구 전체를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교과서를 쓴 사람중에 훌륭한 학자가 아닌 예는 없습니다. 그들 저자들이 인정받는 것은 훌륭한 교과서를 써서가 아니라 훌륭한 연구자인 까닭이지요. 그렇기에 논문이 더 중요하냐 교과서가 더 중요하냐는 식의 비교는 처음부터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오히려 "내가 훌륭한 교과서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연구를 열심히 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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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5 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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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으로 한정해 말하자면, 교수의 연구업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정답이 없는 문제이겠습니다만, 미국의 경우 top school들일수록 명문화된 기준이 없거나 있어도 그저 참고기준 정도로만 생각들을 한다고 얘기해도 무방할 겁니다. 여기에 peer review라는 절차가 적용이 되지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존 교수들의 '눈에 만족스러울 정도의 연구업적을 만들어내라'가 기준인 겁니다. 반면 미국에서도 정량적 평가를 하는 학교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널별로 몇편 이상 하는 식의 편수기준인 경우가 많지요. 한국의 많은 학교들처럼 점수제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제도를 선택할 것인지는 구성원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어떤 제도가 다른 제도보다 선험적으로 우월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top school들일수록 peer review process와 유사한 방식을 택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Reviewer들이 제대로 하는 경우 그게 quality control면에서 가장 효율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요.
정량적 평가를 편의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의 100배쯤의 강도로 정량평가를 유명대 재직여부와 동일시하는 극단적 비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논문 편수는 간판이 아닙니다. 논문 편수 많아서 동료학자들에게 존경받는 경우는 있지만 유명대학에 재직한다고 동료학자들이 존경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유명대학에 있던 아니던 그 사람의 CV가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렇게들 말하지요: you are what you do. You are where you work인 경우는 없답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학자로서의 칼 세이건에 대한 평가는 그의 대중적 저술과는 무관해야 합니다. 학자로서의 크루그만이 그의 대중적 인지도와 무관하게 그의 학문적 업적만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훌륭한 학자는 by definition 학문적 업적이 높은 사람이고, 경제학으로 한정해 말하자면, 학문적 업적은 peer들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중저술가가 폄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대중저술이 많다고 해서 학자로 평가되어서는 안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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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
11-12-15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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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님
많이 배웁니다. 꾸벅...
부언하자면 명문대 졸업-명문대 재직의 이야기는 아주 극단적인 경우를 한번 상정해본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
그리고 대학 또는 정부가 교수들을 정량적으로 평가해야 할 필요성과 그 평가 잣대로서 주요 학술지 논문 게재라는 기준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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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1) 경제학과 과학(본문에서는 수학, 댓글에서는 물리학)과의 수평 비교
맨큐의 말처럼 경제학자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생물학에서도 집단선택론자와 유전자선택론자가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앞서 얘기했던 바 있지요. 학파가 없는 학계라는 것은 본디 없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생물학자가 그런 것처럼, 경제학자들도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면서 20세기 중후반부터 들어 상당히 고도의 합의를 이뤄내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스티글리츠의 경제학 개론을 읽어보면 오히려 경제학자들 사이의 이견이 대중적으로 매우 과장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대목이 있습니다((<스티글리츠의 미시경제학>, p.61). 예컨대, "관세와 수입쿼터는 대체로 경제적 후생 수준을 낮춘다"는 진술에 동의하지 않는 경제학자는 생물학자 중에서 창조론자를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자들 사이에서의 이견이라는 것은 진화론이라는 큰 합의 속에서의 미세한 이견이지 창조냐 진화냐 그런 수준의 이견은 아닙니다. 주류 경제학자 중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경제학이나 박현채의 민족주의 경제학을 진지하게 존중해줄만한 이견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예요.
그리고, 본문에서 인용한 하디의 이야기는 '저널리즘'(자신이나 다른 수학자들이 이루어놓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과 '아카데미즘'(새로운 정리를 증명하면서 수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다르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봐야지요. 학자의 생명과 본업은 분야 이해와 발전에 있어 전문성과 독창성을 세우고 그것을 동료 전문가로부터 인정받는데 있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해설, 비평, 감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현대의 모든 학문은 고도화되어있기 때문에 (대중을 대상으로 한) 해설, 비평, 감상은 수학만이 아니라 경제학을 포함 그 어떤 학문도 직접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능을 못합니다.
뭐, 장기자님이 얘기하는 해설, 비평, 감상이 상아탑 내에서의 아주 전문적인 것을 가르키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지금 이준구 교수가 취하고 있는 대중 소통에 대한 논의 맥락이라면 핀트가 어긋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2) 교과서의 중요성
교과서보다 논문이 중요하다는 것은 제게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뭐, 개인의 표현의 자유로서 "나는 교과서가 논문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하는건 인정할 수 있습니다. 허나 그걸 표현의 자유로 인정하는 것과 그 진술이 맞냐 그르냐, 또 옳은 가치관을 담고 있냐 틀린 가치관을 담고 있냐라는 판단은 또 별개의 문제라고 봅니다.
저는 이준구 교수식의 논리는 한 학문이 자신의 생명력을 이어나가기위한 정상적인 인센티브 체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논문을 쓰는 일은 교과서를 쓰는 일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예요. 만약 학계가 논문 집필보다 교과서 집필에 큰 가중치를 준다면 학자들 중에서 논문을 쓸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준구식 가치관을 받아들여 학자가 좋은 논문을 쓰는 일로 경쟁을 하게 안하고 좋은 교과서를 쓰는 일로 더 경쟁을 하게 만든다면 과연 해당 학문이 발전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학자들 숫자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다종의 교과서가 양산되는 일이 과연 그 학문의 발전인가요?
과연 기자라면 본인이 직접 특종을 잡고 기사쓰는 일과 기자학교 나가서 기자지망생 가르치는 교본 만드는 일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할까요?
물론, 말은 둘 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다 중요한 일이다고해서 두 일의 가치가 정말 등가일 수는 없습니다.
기자가 특종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식의 가치관이 널리 확산된다면, 그 기자가 몸담은 언론사는 물론이고 아예 저널리즘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학자는 학자다워야하고, 기자는 기자다워야 한다고 봅니다.
(3) 학자에 대한 평가
제 생각에는 주요 학술지 게재 논문 건수로 학자의 실력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일단은 수능시험성적으로 수험생의 실력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과 다름없는 현실적인 양해사항입니다. 이런 것을 물론 편의주의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장강명님과 같은 극단적 논리를 편다면 그것은 입시 거부론, 대학 거부론같은 나이브한 생각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학 신입생 정원은 한정되어 있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고, 학교의 권위는 세워야하고,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킬려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줄을 세워야 합니다. 대학 교수 정원을 채우는 일이나 상아탑의 학자간 명성 자원 배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아탑의 명성 자원이 무한정하지 않은 판에 결국 어떤 식으로든 각 학자들 사이에서도 변별력을 내야하고 그래도 가장 승복이 가능한 룰이 현실적으로는 주요 학술지 게재 논문 건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씩 개선의 여지야 항상 있을지 모르겠지만 파격적 대안은 애초 없다는 말이지요.
계량적인 대학순위 평가나 학자 평가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있고, 물론 그 동네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논란도 있습니다.
美 대학순위 평가’ 찬반 논란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820010010
하지만 제가 아는한 이렇게 줄 세우는 것 외에 구성원의 생산성을 자극하는 가장 '어진' 채찍이 달리 없어요.
학생 성적을 매기지않는 학교는 모든 열등생들의 꿈이었지만 단 한번도 정상적인 학교에선 이룩된 역사가 없고, 교수 논문실적 평가하지 않는 학교도 혹시 이준구 교수의 꿈일는지 몰라도 최소한 국민세금 나가는 최고 국립대학교인 서울대학교에선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칼 세이건은 학자로서의 칼 세이건과 과학비평가로서의 칼 세이건을 구분해야한다고 봅니다. 물론 칼 세이건은 학자로서도 그리 떨어지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제가 예전에 rathinker님에게 남긴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
최근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의 <과학의 변경지대(The Borderlands of Science)>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요. 거기 보니까 셔머가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해서 미국의 대중과학자이자 가장 저명한 과학적 회의주의자인 칼 세이건(Carl Sagan)의 학문적 업적, 정치적 편향, 사생활 등등을 세세하게 훑어놨더라구요.
셔머에 따르면, 칼 세이건은 이력서가 무려 "각 페이지마다 265줄씩 빽빽하게 타이핑된 2킬로그램짜리 책"이랍니다. 본업인 과학자로서도 일단 500편의 논문을 썼고(최고 학술지인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채택된 논문만 67편), 부업인 과학작가쪽으로도 퓰리처상 수상작을 포함한 31권의 단행본을 저술했다고 하고요. 명예박사학위만 23개였으며, 평생 89가지 연구직과 관련 수상경력이 있었다지요.
허나,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긴 세이건에 대해서도 미국 학계에선 "단지 (과학) 홍보 담당에 불과했다"는 냉엄한 평가가 나온다고 합니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는 세이건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 전기가 나올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비하했을 정도라네요. 하긴 칼 세이건의 학문적 입지는 아주 확고하지는 못한 것이어서 결국 미국의 대표적인 석학 인증인 국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은 되지 못했죠.
칼 세이건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역시 한국에선 그만한 지명도를 갖고있는 안철수나 정재승에 대해선 우리 사회가 정말 황당할 정도로 아무런 평가(검증)가 없는 것이고, 이런 현실이 곧 우리 사회의 허술함을 정확히 반영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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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나 기자 등 [모든 직역]에 대한 최종 가치판단을 할 때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진화의 역사를 거쳐온 인류가 선택 싯점에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경쟁력있음Competitiveness"이라고 봅니다.
교수레벨이 국립대라면, 국제적 경쟁력이 잣대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국제적 경쟁을 버린다면 아시아 순위를 따르거나 국내 순위를 따지는 등 하위 레벨로 강등시키는 절차가 남았다 봅니다.
반면, 지방 무명의 대학에서 혹은 어떤 직장에서 국제적 경쟁력을 가질 만한 입증자료를 제시한다면 국가 레벨을 상향시킨 공로를 인정해 주는 절차와 방식을 안내해 주는 것이야말로 [정의]이고 [공정]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만한 수 많은 인물들과 집단들은 우리 남한 곳곳에 있을 겁니다.
참고로 포항공대의 역대 총장과 카이스트의 역대 총장의 프로필입니다.
카이스트 역대총장
http://www.kaist.ac.kr/sub01/sub01_01_05.html
포항공대 역대총장
http://www.postech.ac.kr/k/univ/president/5th/3.php
저는 금년 수많은 학생-교수의 자살건으로 더 유명해지신 [서남표]총장이 만약 [서울대]개혁을 추진한다면 떨어뜨려야 할 일순위 중 한 명은 바로 이준구교수와 같은 업적과 실적이 보잘 것없는 폴리페서아닐까 합니다.
서울대의 교수집단이기주의와 반-세계화는 이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준구 교수와 같은 [망언]을 인정하면 국립 서울대가 레벌을 스스로 낮추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국제경쟁력을 내팽게친 국립서울대 교수진들의 행태가 바로 이준구교수 式 ['新'-지대구축]이 아닐까 합니다.
또 다른 실례로, 조중동 등의 종편방송에 반대하는 기성 언론권력 역시 그러한 ['新'-지대구축]과 이익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지요.
진화해 온 인류에게 [경쟁력있음]이란 명제는 어느 시대, 어떤 집단과 지역에서나 선택의 1차 기준인 것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은 바로 그런 [경쟁력있음] 그 자체아닐까요.
책임있는 상위 레벨 지도자들은 국제사회에서 공동체를 책임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제 의식이 지나칠까요.
결과적으로 이준구교수 방식이 위기극복을 잘 할까요? 아니면 서남표총장 방식일까요?
이준구를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서울대 교수평가 방식이 더 혹독해 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제대로 똑똑한 후학이 그 자리를 메웁니다.
현재와 같은 교수운용 방식의 서울대에 젊은 수재들이 입학하는 것은 스스로 바보가 되는 가장 짧은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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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
11-12-15 1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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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님, 말님/
음... 사실 무소의님이나 말님 말씀들이 상식에도 부합하고 제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그럼에도 글을 남기는 건 일종의 딴죽을 걸어보고 싶어서인데요,
이렇게 딴죽을 거는 이유는... 그냥 무소의님이랑 말님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 자체가 재미있어서 그렇습니다.
학자다움이란 뭘까, 학자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생각도 정리하게 되고요.
이런 글이 흔히 말장난으로 빠지기 쉬운데, 혹시 그런 낌새가 보이면 주의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소의님, 말님 말씀은 대체로 이와 같이 정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a) 어떤 학자에 대한 평가는 그 학자 본연의 영역에서 이뤄져야 한다.
(b) 학자 본연의 영역은 연구다. (대중저술이나 강연이 아니다.)
(c) 연구는 논문으로 나타난다.
(d) 주요 학술지 게재 건수는 믿을만한 논문 평가 잣대가 된다.
(d)에 대해서 무소의님과 말님, 저는 다 동의하지만 동의의 정도가 좀 다른 듯합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그 외에는 다른 객관적 잣대가 마땅치 않으니 받아들인다는 정도입니다. (뭐 인용빈도 등으로 양이 아니라 질을 측정하는 보완 방식도 있긴 하겠습니다만)
무소의님과 말님도 이 잣대의 한계에 대해서는 인정하시지만 저보다는 더 흔쾌하신 듯하네요.
대학에서 주요 학술지 게재 건수로 교수를 평가하는 것에 대해 저는 찬성합니다.
그런데 주요 학술지 게재 건수가 몇 편 안 되니 이 사람은 훌륭한 학자가 아니다라는 데에는 저는
원칙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론 평생 논문 두세 편만 쓴 대학자도 있을 수 있겠죠. (이준구 교수에 대한 얘기는 아니예요)
(b)에 대해서 저는 무소의님, 말님과는 다소 의견이 다른데 아마 논리로는 제가 밀릴 듯합니다 ㅎㅎㅎ
저 자신 확신을 잘 못 갖고 있어서요. 학자 본연의 영역이 연구일까...
이는 아마 학자와 학문에 대한 관점의 차이 때문일 것이고, 얼마간 철학적인 질문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학문의 세계란 사회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고, 학자는 이 학문의 세계에만 봉사하면 되는 것인가.
또는 학문은 사회와의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며, 학자는 학문과 사회를 잇는 존재인 것인가.
어느 관점이냐에 따라 좋은 학자나 학자의 사명, 학자적 양심과 같은 개념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테죠.
예를 들어 "경제학자들에게는 당대의 부조리에 응답해야 할 책무가 있다"라고 누가 이야기할 경우
아래 관점인 것이고(최근의 예로는 조선일보 올해 10월 12일자 사설-경제학자들, 밤길 더듬는 국민 발밑 비춰주는 사명감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11/2011101102646.html)
이런 경우에 좋은 경제학자라 함은 학문적 업적만으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겠지요.
실제로 제가 보기엔 많은 경제학자들이 정부에 경제 자문을 하거나 경제정책에 대한 자기 의견을 밝히는 걸
일종의 사명처럼 생각하는 듯합니다. 맨큐도 부시 행정부인가에서 경제 자문역을 했었지요 아마?
잠깐 딴 길로 새면, 기자의 기자다움은 특종을 하는 것이다라는 예는 좀 잘못됐습니다.
기자가 쓰는 기사도 여러 종류입니다. 스트레이트 특종이 있는가 하면, 해설 기사도 있고, 칼럼도 있습니다.
특종 잘 하는 기자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사안 잘 정리하는 저널리스트도 있고, 통찰력 있는 칼럼 쓰는
기자도 있겠죠. 토머스 프리드먼이 특종 많이 해서 그 자리 오른 건 아니잖습니까?
영화 기자로 유명한 이동진 기자가 특종해봤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봤고요.
"골 잘 넣는 선수가 좋은 축구 선수"라고 정의해버리면 게임 운영을 잘 하는 미드필더나 탁월한 수비수를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게 됩니다.
저는 학자다움에 대해서도 "연구가 본연이고 연구 잘 하는 학자가 좋은 학자"라는 규정짓는 것이
그런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닐까 좀 경계하는 마음입니다.
그럼 학자의 본연이 뭐냐, 좋은 학자는 뭐냐라고 저에게 물으시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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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저도 장강명님 기자와 이렇게 글타래를 이을 수 있는게 영광이고 무척 재미있습니다. 이런 대화 속에서 독자들이 뭔가 얻어가는게 많으면 좋겠네요. ^^
장기자님과 제가 전반적으로는 생각이 다르진 않은 것 같고요. 다만 살짝 이견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제 생각을 밝혀보겠습니다.
1.
"주요 학술지 게재 건수가 몇 편 안 되니 이 사람은 훌륭한 학자가 아니다라는 데에는 저는 원칙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론 평생 논문 두세 편만 쓴 대학자도 있을 수 있겠죠. (이준구 교수에 대한 얘기는 아니예요)"
네. 물론 아이디어의 임팩트라는게 정량적으로 그리 쉽게 측정할 수 있는게 아니고, 아예 측정 범위 자체를 완전히 뛰어넘는 업적(이를테면 DNA발견, 상대성이론 등등)도 있을 수 있으니 주요 학술지 게재 건수가 반드시 학자 본업 측면에서도 주요 잣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한 개인이 평생 논문 두서너편으로만 버틸 수 있는 탁월한 업적을 만드는 일이, 현대의 전문적이고 복잡한 학문 체계에서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 일인가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요즘은 거개의 연구가 공동연구이기도 하고, 연속적이고 추가적인 연구(논문) 속에서 업적이 차차곡 만들어지지 정말 논문 단 한편에 업적이 다 담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가령, 누가 노벨상 받을 수 있는 수준의 논문을 썼다고 한다면, 어차피 그 이전에 그 업적에 준하는, 그와 연계된 전문 논문들을 계속 쏟아내고있는 상황이 태반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평생 논문 두세 편만 쓴 대학자"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의 지적도 역시 가능합니다. 이는 그 "논문 두세편"이 과연 언제 쓰여졌냐와 관계되지요.
이 사이트의 정신적 지주인 양신규 교수님은 MIT 대학원에 들어갔을때 그 대학의 학장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레스터 서로우(Lester Thurow)를 동료 교수들이 아무도 존경하지 않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skyang] 틀린 걸 틀렸다고 하는 것
http://www.skepticalleft.com/bbs/tb.php/01_main_square/19626
한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미국 학계의 분위기는 10년전에 어쨌고 20년전에 저쨌고가 아니라 일단 최근 5년내 탁월한 연구업적을 보여줘야 '대가'다고 인정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그가 지금 리서치 프론티어에 속해있나 그렇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합니다.
DNA 발견의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긴 J.D. 왓슨(J.D.Watson)의 경우조차도 후속타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모양인지 괄시를 많이 받았고 결국 과학행정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그러더라구요.
뭐, 이준구 교수는 어쨌거나 하나도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들입니다. ^^
2.
"기자의 기자다움은 특종을 하는 것이다라는 예는 좀 잘못됐습니다. 기자가 쓰는 기사도 여러 종류입니다. 스트레이트 특종이 있는가 하면, 해설 기사도 있고, 칼럼도 있습니다. 특종 잘 하는 기자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사안 잘 정리하는 저널리스트도 있고, 통찰력 있는 칼럼 쓰는 기자도 있겠죠. 토머스 프리드먼이 특종 많이 해서 그 자리 오른 건 아니잖습니까? 영화 기자로 유명한 이동진 기자가 특종해봤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봤고요."
토머스 프리드먼이나 이동진의 경우는 정형화된 기자라기보다는 비평가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해요. 제가 "기자는 일단 특종을 하고봐야한다"고 할때의 기자는 통속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 그 기자를 얘기한 것이지요. 물론 요즘은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이도 기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정형화된 기자의 경우는 역시 특종, 그리고 시의를 잘 잡은 기획기사 등이 그래도 최고의 업적이 아닐까 합니다.
뭐 기자와는 업적 평가 방법이 다소 다르긴 하겠지만, 비평가도 특정한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그 분야에서 '특종'과 비슷한 류의 참신한 시각, 올바른 시각의 컬럼을 순발력있게 제시할 수 있으면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봅니다. 학계와 같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언론계에서도 다 임팩트 기준이 있겠지요. 적어도 저명한 다른 비평가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뿐인데 수사가 더 좋다고 높이 평가받는 비평가는 없지 않을까 해요.
지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과 관련해선, 그 어떤 분야라도 반드시 사고의 독창성, 혁신성이 최고의 가치일 수밖에 없다는게 제 생각인데, 과연 예외가 있을까 싶네요.
3.
아래는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대해서 쓴 글이 있는데, 제가 자주 인용하곤 하는 글입니다. 독자들 보라고 옮겨봅니다.
* * *
오늘 여러분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학문에 대한 내적 소명에 대해서 듣고 싶어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럼 학문의 내적상황은 어떠한 것일까요. 이 내적상황을 규정하는 첫번째 사실은 학문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전문화단계에 들어갔으며, 이 과정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 학문영역에서 진실로 탁월한 것을 성취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매우 철저한 전문화를 성취했을 경우 뿐입니다.
인접영역에 침범하는 모든 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체념이 깔려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런 영역 침범적 연구는 기껏해야 그 인접영역의 전문가에게 그의 전문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쉽게 떠오르지 않는 유용한 의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나름 의미를 갖지만, 연구 자체는 매우 불완전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실제로 학자는 오로지 엄격한 전문화를 통해서만 자신의 연구 가치가 지속될 것이라는 만족감을 얻게 됩니다. 오늘날 진실로 결정적이며 가치있는 업적은 항상 전문적인 업적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일단 가죽 눈가리개를 끼고,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옮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생각에 빠질 능력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을 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즉 "내가 그 판독에 성공하기를 수천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다른 수천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막스 베버(Max Weber), <직업으로서의 학문(Wissenschaft als Beruf )>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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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근대 학문(특히 과학, 경제학 등의 분야)은 학술지라는 무대를 통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communication과 peer review를 통해 진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근대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의 주업입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가 해당 분야의 동업자들에게 남들보다 훌륭한 학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당연히 학술지라는 무대, 그것도 일류 학술지라는 링에서 여러 건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며 동업자들과 겨루어야만 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평생 논문 두세편만 쓴 대학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같은 업적이라면 두세편이 아니라 논문 한 편이라도 발표한 순간부터 세기적인 대학자일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논문 다음에 더 이상의 연구 업적이 없다면 과거의 전설일 뿐 동업자들로부터 현재의 실력을 인정받는 현역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
복싱 선수가 동업자들에게 현업으로 인정받으려면 은퇴하지 않고 링에서 맞수들과 피흘려가며 싸워야만 합니다. 슈거레이 레너드가 전설적인 복서로 인정받지만 현역 복서들과 겨뤄도 자기가 우수하다고 떠벌리지는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려면 포먼처럼 링으로 복귀해야죠.
교과서를 써서 후진을 양성하거나, 대중에게 해당 학문의 지식을 교양 차원에서 보급하기 위한 저술을 하는 것은 학자의 주된 업무는 아니고, 모든 학자가 그런 능력을 지닐 필요도 없습니다.
교과서는 해당 학문의 모든 제반 분야에 대해 comprehensive하게 숙지하고 전 분야에 걸쳐서 최근의 쟁점이 무엇인지, 변화하고 있는 컨센서스의 양상이 무엇인지 뒤쳐지지 않고 잘 쫓아가고 있는 사람이 제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지간한 근대 학문이라면 이런 능력은 직접 일류 학술지라는 링에서 연구 결과를 수시로 발표하고 일류 학술지의 에디터, 리뷰어를 하고 있는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것이지, 이런 쪽에는 별 관심이 없고 정치 쪽으로 관심이 많은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때문에 위의 무소의 님 말씀처럼 일류 교과서는 일류 연구자라야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워낙 학문의 분야가 광대해서 교과서 챕터 별로 책임 저자가 다른 경우에도 최소한 대표 저자(혹은 편집자)가 일류 연구자라야만 어떤 분야에서 어떤 연구자가 교과서를 기술할 만큼 뛰어난지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대중에게 교양을 보급하기 위한 저술을 하는 경우에는 굳이 최신의 컨센서스까지 잘 몰라도 글솜씨가 뛰어나고 교과서 수준의 지식만 보유해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아시모프 같은 경우는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나 싶고 아시모프는 과학 해설가, 소설가로서는 당연히 일류라 하겠지만 학자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경우겠죠.
이준구 교수 같은 경우 과거에 연구자로서 잘 나갔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류는 커녕 3류의 연구자도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연구한 게 있어야 일류고 3류고 구분을 하죠. 제가 경제학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아예 연구자라고도 할 수 없는 이런 분이 다른 교과서에 비해 오히려 훌륭한 교과서를 쓸 수 있다면 경제학은 아예 근대 학문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물론 그럴 리는 없겠죠).
수학적, 정량적, 통계적인 연구방법론을 사용하는 근대 학문이라면 훌륭한 교과서를 쓰려면 연구자로서도 당연히 일류의 수준이라야만 합니다. 그래야 도대체 어떤 분야에서는 최신의 논쟁점이 뭔지, 컨센서스의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이런 내용을 제대로 교과서에 기술해서 후학들을 교육하지 않겠습니까?
이준구 교수는 위에서 비유한 프로 복서로 치자면, 아예 프로 데뷔도 못하고 대학교 동아리에서 선후배들하고 합숙훈련가서 랭킹전 몇 번 한 아마추어 복서(지금은 해당 학교에서 복싱 가르치는 교수를 하고 있다고 치죠. 뭐 대학에 복싱과가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가 자신이 그래도 알아주는 복싱 고수입네 하며, 프로복싱 세계 랭커들을 별 거 아니라고 희화화하는 꼴입니다.
"정말로 잘 가르치는 코치는 슈퍼헤비급 세계챔피언보다도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네, 임군. 지금까지 세상에 크나큰 임팩트를 준 타이틀 매치가 몇 건이나 된다고 생각해? 레너드, 타이슨, 파퀴아오... 지금까지 세상에 큰 임팩트를 준 세계챔피언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임군? 그에 비해 정말로 훌륭한 코치는 얼마나 많은 훌륭한 복서들을 길러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임군."
이준구 교수님... 야심있는 소년들은 세계 챔피언이 되기 위해 복싱을 하는 것이지 코치가 되려고 복싱을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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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ina/
이준구 교수는 코치 중에도 급이 많이 떨어지지요. 그는 논문을 직접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교수랄 수는 없기 때문에 적어도 선수와 같이 링으로 가는 수석 코치랄 수는 없습니다. 개론 교과서 외엔 내놓을 업적이 없는 것을 보면 그냥 체육관에 들어오는 입문자에게 줄넘기랑 샌드백 치는 법 가르치는 코치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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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lerian님,파비안느님/말러리안님이 링크를 해주신 한겨레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검증된 저널에 치열한 검증을 받고 등재가 되는지 여부는 그 교수가 자기 업무에 얼마나 충실하게 일을 했는지에 대해 가장 기본이라고 봅니다. 빅뉴스는 검증된 저널에 등재된 논문이 없다는 점과 자기분야가 아닌 정치적 쟁점에 대한 의견 발표 2가지 점을 지적하고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요. 이 팩트에 대해 반약 반박을 한다면 검증된 저널에 충분한 논문을 냈다는 증거를 제기하거나 간접적으로 조사방법을 확인하여 미흡하다는 점을 들어 우회적으로 검증된 저절에 충분한 논문을 냈다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외 또다른 반박은 후자의 것으로 자기 분야가 아닌 정치적 쟁점에 대한 의견 발표의 점이라는 팩트가 사실이 아님을 들거나 그외 일반시민으로써 자기가 모르는 분야게 대한 정치적 쟁점 발표에 대한 가치판단 부분으로 반박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저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인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빅뉴스가 사실관계로 삼을 검증저널이 아닌 다른 저널에 발표를 했다는 사실은 관련없는 사실을 이야기 한 것이고 특히나 빅뉴스는 10년간 검증된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고 주장을 했지 10년간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다고 주장을 한 바가 없는데 마치 그렇게 주장했다는 점을 전제로 한 후 반박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실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생사람을 잡는 것이죠.오히려 명예훼손을 주장을 해야할 측은 빅뉴스지 이준구교수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한겨레신문입니다. 한겨레 신문은 교수님 빅뉴스의 내용은 그게 아닌데요.라고 정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준구교수는 신문기사를 쓰도록 할 정도라면 상대방이 어떤 것으로 비판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해야되는 것 아닌가요?
지금이라도 "연구를 하지 못 해 죄송하다."고 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러리안님의 본문글,댓글,파비안느님의 댓글에 대해 모두 동의하고요. 비판에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이준구교수에 대해 조국교수의 발언 역시 실망입니다. 허위로 평가될 여지가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요.
빅뉴스의 논조도 적절하다고 보고요. 교수가 검증된 저널에 논문을 낼려고 노력하고 내는 것은 그가 해야할 기본적인 일 입니다. 해도 그만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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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5 1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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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구가 다 ground breaking한 연구일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을 겁니다. 전 세계에 수없이 많은 경제학자들 중에 정말 frontier에서 연구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학자는 비교적 소수에 불과할 겁니다. (물론 연구의 지평을 확장한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지기는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웬만한 수준의 학술저널에 출판되는 논문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novelty가 있으므로 그런 것들은 다 연구의 지평을 확장한다고 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학문분야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수준의 novelty를 갖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한정하겠습니다.)
대다수의 연구는 그런 소수의 연구자들이 한 연구를 받아서 응용을 하거나, 다른 환경에 적용해 보거나, 약간의 twist를 가해 보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저는 그런 연구들도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연구들이 실용상의 가치는 더 크다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연구들은 기본적으로 파생적이라는 특성을 갖습니다. 소수가 했던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연구'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연구들인 거지요. 그러므로 실용상의 가치가 큰 연구를 한다고 해도 소수의 ground breaking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을 "그런 논문은 소수만 읽는다네"라고 무시해서는 안되는 거지요.
학자들이 연구의 성과를 현실적 문제들에 적용하려는 노력 즉, 정부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한다거나 정책자문에 응하거나 정책적 보고서를 쓴다거나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연구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사회과학은 현실문제라는 것이 학문 존립의 토대가 되는 까닭에 연구와 현실참여라는 것을 칼처럼 분리시킬 수는 없는 까닭에 소위 현실참여라는 것도 수단과 방법에 따라서는 학문활동의 일환일 겁니다. 예컨대 한은의 금융정책에 대해 학술적 논문을 쓴다면 그것은 현실참여이자 학문활동이 되겠지요. 하지만 한은의 금융정책에 대해 대중지에 기고를 한다면 그것을 학문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모든 학자들이 소위 현실참여라는 것을 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모든 연구가 ground breaking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사회 안에서 사람은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합니다. 저는 아버지이자, 아들이지요. 제가 하는 행위는 아버지로서의 행위도 있고, 아들로서의 행위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행위를 할 때 제 역할은 아버지이고, 아버지에게 적용되는 판단기준으로 판단받는 것이 맞을 겁니다. 제가 만일 아들로서의 행위를 하면서 아버지인양 거들먹거린다면 웃기는 짓을 하는 거지요.
대중을 향해 글을 쓰는 것이 학자로서의 책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학자로서의 책무는 연구입니다. 대중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은 학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본인이 하고 싶어서 또는 본인이 그런 일을 할 책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서 하는 것일 뿐, 그런 일을 잘 한다고 더 훌륭한 학자인것도 아니고, 그런 일을 안 한다고 학자로서의 책무를 저버리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연구는 하지 않으면서 학자라는 이름으로 대중지에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학자로서의 책무를 못하는 거지요. 그게 아들 노릇 해야 할 때에 아버지인 양 거들먹 거리는 셈이라고 봅니다.
학자가 대중을 향해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대중들은 어디 교수, 무슨 박사, 어떤 분야 학자라는 타이틀에 과도한 신뢰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대중에게 글을 쓰려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에 대한 신뢰 정도를 본인이 만족시킬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물론 보다 바람직하게는 대중들이 그런 타이틀에 속아넘어가지 않아야 할 테고, 언론이 그런 타이틀을 이용해서 대중을 기만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할 겁니다.
대중을 향해 말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현명하지 못하다면 세상이 개판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그런 분들의 역할과 노력을 폄하할 필요도 없고 폄하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을 학술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사안별로, 경우별로 달리 볼 문제이지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학술활동이 아닌 대중을 향한 활동을 하는 분들에게 굳이 학자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분들은 학자라는 타이틀이 아니어도 다른 reward를 받고 계십니다. 돈도 많이 벌 테고, 대중적 인기도 많을테고, 아마 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보다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실 겁니다. 거기에 더해 학자라는 이름까지 갖고자 한다면 좀 너무 가지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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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lerian/
그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일류학술지에 논문을 내본 적이 있어야 뭐 조언도 하고 지적도 하지.. 이건 "열심히 하게"란 말 말고는 도무지 뭘 도와줄 능력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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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님 지적에 동의하면서..
경제현안에 대해서 대중지에 칼럼을 쓰거나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경제학 지식을 동원해서 대중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나마 칼럼을쓰는 것이 아무런 논리도 없이 트워터에 한 줄 지껄이는 행위보다는 한결 나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합리화를 위한 우스꽝스러운 논리를 내세울거면 본인을 위해서나 동료들을 위해서나 그만 글을 접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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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로 |
11-12-16 1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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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라는 직업이 두 가지 기능을 갖잖아요. 연구자이자 교육자.
이준구 교수님, 후자로서는 애도 썼고 공로도 있는데, 전자로서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보니,
설움 받는다는 생각, 피해의식이랄까 열등감이랄까 그런 마음이 생기셨던 거 아닐까..
좋은 교과서를 쓰고 싶어도 못쓰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점에서만 자부심을 가지시면 될 것인데 말이죠.
(아주 책임지지 못할 말씀을 하셔가지고 된통 혼이 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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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6 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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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선배님, 오래간만입니다. 전 제 앞가림을 열심히 하고 있느라 이런 양반이 방송을 타도 그냥 그런가보다, 요즘같은 시대에도 누가 저런 양반들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하긴 방송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겠지요.
좀 짠한 마음도 생깁니다. 덩치는 산만한 대학생녀석이 또래들과 못 어울리고 초딩들 앞에서 힘자랑 하면서 박수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는 느낌같은 것이요. 저런 말도 안되는 글이 언론의 주목을 잠시라도 살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세상도 좀 짠하고요. 저런 분이 앞으로도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하나마나 들으나마나 초딩 앞에 두고 엄마 아빠 말씀 잘들어야한다고 말하는 것과 별 차이없고 때에 따라서는 본인 스스로도 정확하게 개념이 서 있지도 않은 얘기들을 할 것이라는게 역시 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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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님 많이 바쁘시지요.
요즘은 개인평가뿐 아니라 매년 학과평가해서 타대학하고 비교하는 지라 적어도 기본은 해줘야한다는 무언의 압력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압력으로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도 정년까지 별 탈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만 순위 올리고 구조조정대학으로 지정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무사태평하게 지낼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나이 더 먹고 기본도 못하게 되면 조용히 찌그러져 후배교수님들 뒤치닥거리나 열심히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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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6 2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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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후배교수들 뒤치닥거리라니 거 무슨 겸양의 말씀을 하십니까? 한편 생각해보면 겸양삼아 말씀하신대로 뒤치닥거리까지야 되겠습니까마는 새로운 세대들이 앞의 세대에 비해 역량이 높아야 발전도 되는 것이니 나이가 들면 뒤로 물러가게 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모습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나이듦을 고민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멋있게 나이드는 분들과 추하게 나이드는 분들을 주변에서 보며 나는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문득 문득 하기도 합니다.
최소한 잘나가는 후배들 명성을 깎으려는 노욕은 부리지 말아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배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 세대 젊은 교수들 중에 제 앞세대들이 꿈도 못 꾸던 역량과 성과를 보이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이미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오른 분들도 꽤 되지요. 선배가 되어 그런 후배들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그런 후배들의 역량이 이 사회에서 넓게 인정되도록 노력은 못할망정 말도 안되는 망발로 훌륭한 후배들의 성과를 한순간에 고시용 교과서 한권보다 못한것으로 만들고 '아무도 읽지 않는 별 영향력없는 논문'으로 깎아내리는 짓은 하지 말아야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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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6 2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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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교수의 업적 평가는 학교별로 자신들의 선호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고, 학교의 결정은 시장에 의해 판단이 이루어 질 겁니다. 경천동지할 논문 두어편을 쓴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구성원을 가진 학교는 그런 사람들을 높은 몸값을 주고 데려갈 겁니다. 그런 정책의 성과에 대한 판단은 그 학교 출신 박사들이 얼마나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갈 것인가로 판명이 될 겁니다. 성공적인 후학들을 배출한 곳은 번영할테고, 그렇지 못하면 작아지거나 소멸할테지요. 즉, 시장이 얘기해 줄 겁니다.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 옳을 것인가?'가 아니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느냐?'일 겁니다. 사람들의 선택이 선호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시장이 작동한다면 '어떤 기준이 옳으냐?'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남는 기준이 사람들이 더 선호하는 기준일 터이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생존의 문제가 될 테니까요.
사람들이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대는 많은 경우에 대하여 저는 단순히 선호와 선택의 문제라는 관점을 갖습니다. 물론 선택의 귀결이 생존과 소멸의 분기일 수 있겠습니다만, 소멸이라고 해서 불의인 것도 아니고 생존이라고 해서 정의인 것도 아니지요. 질문 자체가 다른 겁니다. 사느냐 죽으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 더 낫다고 저는 봅니다. 최소한 그 문제에는 답이 있으니까요. 반면 무엇이 맞느냐, 어떠해야 하느냐의 물음에는 답이 없는 경우가 많지요.
교수 업적평가는 평가하고 싶은 사람이 마음대로 해도 될 겁니다. 그 평가를 사고 파는 시장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평가의 기준이 맞니 틀리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질문은 의미없는 질문, 사느냐 죽느냐의 질문에 덮여버리는 질문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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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
11-12-17 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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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님/ 아이쿠 ^^ 제가 불리한 거 같아 조용히 발 빼려 했는데... ㅎㅎㅎ
말씀하신 내용들에 대체로 동의하고 제가 알지 못하는 연구자들의 세계도 조금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유익했습니다.
저도 많은 사안들에서 옳네 그르네 싸울 게 아니라 시장 기제에 맡기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기준이 옳으냐'는 질문 자체를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작게는 정치철학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이 되겠고, 크게는 인간이 자신의 선호를 추구하는 존재이냐
(그러니 그것만 만족시켜주면 되느냐) 아니면 초월을 꿈꾸는 존재이냐라고 묻는 질문도 되겠습니다.
초월을 꿈꾸는 것 역시 하나의 선호에 불과하다고 피해가는 것은 순환논리라고 보고요.
"시장의 작동 여부가 중요할 뿐"이라는 관점에서는 야구 선수를 스카우트하는 구단이나, 교수를 영입하는 대학이나,
주식을 사는 펀드 매니저를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로 볼 것 같아요.
세이버매트릭스라는 과학적인 야구 선수 평가방법을 도입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시장에서 보답을
받았듯이, 대학들도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과학적인 평가방법을 개발하고 도입할 유인을 갖고 있다,
그러니 시장 기제가 잘 작동된다면 가장 합리적인 기준을 만들어 공정하게 적용하는 대학이 가장 큰 보상을
받을 것이고, 결국 점점 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교수 평가 방법이 널리 퍼질 것이다.
그런데 어느 구단이 야구 선수를 어떻게 뽑느냐 하는 기준, 어떤 펀드 매니저가 어느 주식을 사느냐는 기준과
대학이 교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제게 좀 달라 보입니다. 정치철학이 끼어드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익 달성에 있어서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기준이라 해도, 성공적이냐 아니냐와 별도로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야 하는 영역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이 목표를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높여서 실력 있는 졸업생을 배출하고자 하는 것'으로 정하고
아래와 같은 사실이 실증적으로 입증됐다고 치면 어떨까요.
-일반적으로 학업 성취도는 담당 교수의 논문 게재건수보다 그 교수 1인당 담당 학생수에 더 좌우되더라.
-공대생들의 학업 성취도는 담당 교수의 논문 게재건수보다는 그 교수의 프로젝트 유치 능력과 더 상관관계가 높더라.
-교수들에게 같은 비용의 투자액을 들였을 때 인문학보다는 실용학과 졸업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높더라.
그래서 대학들이 비싼 몸값의 석학을 모셔오느니 그 돈으로 그저 그런 교수 여러 명을 채용하고, 공대 교수는
로비력을 최우선 요소로 삼아 평가하며, 인문학과 교수들에 대해서는 투자를 줄이기로 한다면?
그리고 그게 매우 효과적으로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는 것으로 판명 난다면?
(거꾸로라도 상관 없습니다. 어떤 대학이 괜찮은 교수 10명을 채용하느니 초고액 연봉의 석학 1명을 선택하고,
법대 교수는 사시 합격 여부로 정하며, 실용학과 교수에 대해 투자를 줄이기로 한다면?)
대학의 목표는 야구 경기(점수 많이 내기)나 펀드 투자(돈 많이 벌기)와 달리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기준이 성공적이냐 아니냐를 논하기에 앞서 그 기준이 지향하는 목표의 타당성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대학의 목표에 진리 탐구나 사회에 대한 공헌이 포함된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위의 사례가 매우 찜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학이 정한 목표 자체가 옳았느냐 아니냐 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이준구 교수에 대한 비판 논의를 제가 자꾸 엉뚱하게 추상적인 질문으로 넘겨서 보기 따라서는 논점 흐리기로
논박을 피해가는 것처럼 비칠 수 있겠다 싶은데 그런 의도는 아니오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말님/
먼저 추천 사이트로 뽑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이런 때 무심한 척 가만히 있어야 쿨해 보이는 건데 ^^
1, 3번에 대해서는 별로 첨언드릴 게 없네요. 막스 베버 참 독한 분이셨군요.
2번에 대해서는... 사실 말님 관점이 정확히 보통의 신문사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특종(저희는 보통 단독이라고 부릅니다)의 기회가 사실상 없는 국제부나(특파원이 아닌 내근 기자들),
비평의 영역에 속하는 기사를 많이 쓰는 문화부 기자들을 약간 홀대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역으로 "특종지상주의가 신문사 망친다"는 문제의식도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요.
독자들에게는 그만한 기사 가치가 없는 건데 경쟁사 기자들이 모르고 자기 혼자 알아냈다는 이유만으로
1면 기사, 또는 첫번째 방송뉴스로 택하는 경우도 왕왕 있어왔고... 전형적인 공급자 마인드죠.
저는 이런 단독지상주의의 부작용이 해설 기사를 홀대하거나 칼럼에 별로 공을
안 들이는 걸로 이어지는 거 아닐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자 입장에서는 한-EU FTA가 체결되면
뭐가 달라지나가 제일 궁금하고, 그걸 쉽게 풀어주는 기사를 원하는데 쓰는 기자 입장에서는
그런 기사는 단독과는 거리가 멀고 데스크 인정도 제대로 못 받을 거 같으니 의욕이 안 날 수 있겠죠.
실은 이 단독지상주의(=단독콤플렉스)가 기자들에게 어찌나 강한지 단독보도를 못한 기자들은
그런 내부 비판을 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저마저도 단독보도 못하는 후배가
"단독지상주의는 문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짜증을 확 낼 겁니다.
그런데 기자의 일이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라면 해설 기사 쓰는 것도 기자의 일이고,
해설 기사 잘 쓰는 것도 중요한 임무 아닐지요. 또 칼럼에서도 사고의 독창성, 혁신성이 얼마든지
발휘될 수 있다고 봅니다.
All/
긴 댓글을 작성하면서 '내가 처음에 왜 댓글을 달았을까' 생각하게 됐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알코올이고, 보다 깊은 원인은 이준구 교수(저는 이 분을 잘 모릅니다)라는 일개
교수에 대해 뭐 이렇게까지 길게 논의가 오가야 하나라는 심술(저도 몰랐던)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이 교수가 누리는 권력과 그에 따라야 할 책임에 대해 말님께서 쓰신 바는 잘 읽었는데,
말님은 아마도 '지식권력은 상당히 중요한 권력이고 견제 받아야 한다'고 여기시는 것 같고,
저는 '저렇게 뜬 게 뭐 몇 달이나 갈까' 하는 태도여서 서로 받아들이는 무게가 다른 듯합니다.
지식권력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저는 "총이 펜보다 강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 ㅎㅎㅎ
조국 교수에 대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심술에서 시작했지만 바짝 긴장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무례가 안 된다면 저는 다시 잠수 모드로 들어가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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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제게는 이번 토론이 관련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는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고, 거기에 대해서 여전히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아무래도 '지식권력' 문제에 대해서 예민할 수밖에 없네요. 타겟이 좌파쪽으로 바뀌었을뿐 제 비판대상은 예나 지금이나 '지식권력'입니다. 특히 요즘에야 제 일관성에 대해서 더 명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저는 근본이 안티좌파도 아니고 안티우파도 아니고 바로 '안티지식권력'이지요.
이준구 교수 문제는 . . . 아무튼 이 분이 무슨 말만 하면 주요 언론들이 끊임없이 보도해주고 본인 역시 그것을 즐기는 일과 관련 누군가 견제는 해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서 펜을, 아니 키보드를 두드리게 된 것입니다. 혹시 이준구 교수 이름으로 검색해보심 알겠지만, 이 분 "권력" 정말 장난 아닙니다. 아마 이준구 교수만큼 언론을 통해 호사를 누리고 있는 정치인이 국회에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말이 견제지 제가 하는 비판은 무슨 견제도 아니지요. 가령, 저같은 촌부가 게시판에서 이준구 교수 비판했다고 해서, 제 비판 내용이 무슨 이준구 교수의 무덤 비석에까지 새겨지느냐는 것입니다. 설마 그럴리는 없겠습니다.
해서 하는 하소연인데요. 실은 여전히 스켑렙에 호의를 갖고 있는 몇몇 386 형들, 또 이교수의 사회적 발언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386 형들도, 이상하게도 최근 저의 이준구 교수 비판이 너무 가혹하다고 제게 자꾸 잔소리를 하곤 합니다. 이교수의 문제는 얘기도 잘 안하고, 자꾸 저의 태도가 어쩌고 저쩌고 그런 시비만 자꾸 건다는 것이지요.
대충 처세하면서 웃고 받아들이지만, 사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속으로는 정말 무척 분개합니다. 사실 형들의 그런 태도들은 이교수랑 저의 압도적인 영향력 차이는 완전히 빠뜨리고 나오는 것들이거든요.
만약 이교수의 사회적 발언이랑 이교수를 비판하는 저의 사회적 발언 중에서 둘 다 문제가 있다면 과연 어느쪽이 더 사회적 파급효과가 클까요? 과연 별것도 아닌 소통채널을 통해 전파되는 제것이 훨씬 더 클까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면 어느쪽의 것에 가지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안전한 것일까요?
대통령이 문제성 발언 하는 것보다도 촌부가 문제성 발언 하는 것이 훨씬 더 화가 난다는 사람들의 정체란 결국 뻔한 것입니다. 기성세대의 비굴한 정신상태에서 뭘 바라겠냐마는. . .
뭐 장강명님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요. 요즘 세태가 좀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처자식 생기면 똑같아질랑가는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제가 청개구리 근성이 좀 있어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근거를 갖고 맞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누가 자꾸 그걸 밀리거나 뭐라고 시비 걸면 더더욱 열정적으로 미친 척하고서 "맞는 얘기"를 하려고 드는 기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 * 부산에 강준만 교수 팬클럽에 있을때 386 형들이 저한테 우스개로 붙여준 별명이 "근거를 대주십시오"였습니다. 하도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해대서... ^^;;;)
한의학 문제 등등이 다 그렇게 천착하게된 주제들이지요.
이교수 문제도 아마 주위에서 누가 제 비판에 대해서 뭐라만 안했어도 이렇게 게거품을 물면서 계속 비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저같은 촌부가 이준구 교수같은 사람 비판 좀 하는 일로는 아무도 뭐라 하질 않는 날이 오겠지요. 저보다도 뭇 사람들이 이교수의 한마디 한마디에 더 시비거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스켑렙 내에서가 아니라 바로 사회 전반적으로)
그 날이 오면, 저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게 된 이교수같은 사람 비판하는 일을 그만두고 또 다른 권력 사냥에 나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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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
11-12-17 1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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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댓글을 안 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짜피 답이 없는 얘기를 하려는 셈이니 그러셔도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가상의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A대학은 나름의 가치판단하에 세상에 인기없는, 그러나 대학 구성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학문분야에 올인해서 그 분야 교수들만 열심히 채용합니다. B대학은 현실에서 인기가 많아서 학생이 많이 들어올 것 같고 돈도 많이 끌어올 것 같은 분야에 올인해서 그런 교수들만 채용합니다. 그 결과 A대학은 운영불가 상태에 빠지고 B대학은 번영하고 있습니다. 장기자님은 A대학에 정부가 지원을 해서라도 그 대학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시겠나요?
예컨대, A대학이 고대 그리스 문학, 고전 라틴문학에 올인한다면 어쩌겠습니까? 배우려는 학생이 전혀 없다면 그 때에도 그 대학은 유지가 되어야 할까요? 이건 너무 극단적인 예일까요? 어떤 기준은 너무 극단적이고, 어떤 기준은 적당한가요?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장기자님이어야 할까요?
어짜피 판단은 시장이 합니다. 시장이란 교수들, 연구자들, 총장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과 그 학생이 졸업하면 고용하고자 하는 회사의 사장들과, 학생이 졸업하고 결혼하려고 하는 배우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장기자님이 또는 교육에 대한 낭만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 기준으로 무엇이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 판단을 한다고 해도 최종적인 결론은 시장에서 나오는 거지요.
시장의 선택이 옳은가? 그건 답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시장의 선택에 영향을 미쳐서 무엇인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던 예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 노력들이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만들어 냈었는지, 설령 그런 결론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결과가 자신들이 바랬던 만큼 바람직했었는지는 깊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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