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자님이 '또다른 의학은 없다, 고암의학의 예'라는 길에서 마침 Peer Review 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길래, 관련 기억나는 양신규 교수님의 명문을 포스팅해봅니다. 예전에 브릭에서도 소개해본 적이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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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저널리즘, 그리고 혹세무민
학자란 학문으로 밥 먹고사는 사람, 같은 말로 직업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현대의 학문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남한 사람들의 경우는 생각해 본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마 현대의 학문(근대=현대=모던 이다)을 실제로 하고 있는 중이거나 해 본 사람들이 특히 남한 지식인층 중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극소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리학과 화학을 필두로 한 자연과학과 일부 공학 분야는 국내에도 제대로 학문을 하는 분들이 아주 많이 있다. 조금 최근의 현상이지만 경제학이나 일부 경영학 분야의 경우도 제대로 학문을 하는 분들이 소수나마 생기기 시작했다. 인문학이나 여타의 사회과학분야에서는 내가 과문한 탓인지 솔직히 코메니우스(홍성욱 교수) 말고는 내 기준으로는 제대로 된 직업적 학자가 한 사람도 떠오르지 않는다.
남한 지식인들 머리 속에 있는 학자란 율곡이나 다산 정도 - 서구에서는 과학혁명이 시작되고, 계몽철학자들이 민주주의와의 근대 국가의 이성적 기초를 놓고, 산업혁명이 시작될 시기에 세계적 지성흐름과는 철저하게 유리된 채로 고립된 지적 작업을 하던 사람들 정도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학문과 저널리즘과 혹세무민이 잘 구분이 안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번 구분해 보자.
현대의 직업적 학자의 임무는 일단 "자기 분야의 학자들을 (peer) 대상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일" 이다. 이 정의에서 가장 어려운 말은 peer 다. Peer 는 친구가 아니다. peer 는 자기 연구를 평가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집합을 말한다. 이 Peer 들의 Review 에 의해 학자들은 학위를 받고, 채용되고, 승진되고, 귄위가 정해지고, 자원과 권력이 배분된다.
Peer Review 라는 과정은 혹독한 과정이다. 단어하나, 수식하나, 문장하나라는 소심한 문제에서부터, 주장이 근거에 합당하냐 라는 중간 정도의 문제, 그리고 도대체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연구한 거냐 라는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직업적 학자의 결과물은 Peer 라는 괴물들에게 철저하게 해부되고 수정되고 다시 해부되고 다시 수정된다. 이 소심하고 지겨운 과정을 견딜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직업적 학자의 길을 갈 수가 없다.
직업적 학자가 될 능력이나 의지가 없더라도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기 지적 작업을 출판하거나, 아니면 비학술적 잡지, 신문 등에 글을 쓰고, 방송에 출연한다. 나는 그런 분들을 학자와 구분하여 "저널리스트"라고 총칭한다. 저널리스트는 Peer Review 의 지겨운 과정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훨씬 광범한 얘기를 훨씬 적은 증거를 가지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도 나름대로 좋은 저널리스트와 그렇지 않은 저널리스트가 구분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저널리스트가 경제에 대해 썼는데 그것이 일반독자들이 볼 때 이해가 잘 가는 글이고, 더구나 관련된 경제 문제를 연구하는 직업적 학자들이 보기에 맞는 소리가 많으면 그건 좋은 저널리즘이다. 그리고 그 좋은 글을 자주 많이 쓰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된다. 훌륭한 저널리스트의 역할은 훌륭한 학자의 역할에 못지 않다. 물론 학자인 아인쉬타인은 타임 매거진이 선정한 20 세기의 인물이 되고, 저널리스트로 그 정도 영예를 획득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아인쉬타인의 한 일을 잘 정리해서 대중적 언어로 알려주는 저널리스트가 없다면 학문과 대중의 일상의 연결고리가 없어진다.
또 저널리스트의 일이 어려운 학문연구를 대중에게 전해주는 역할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학문의 엄밀성에 따른 소심증 때문에 학자들이 못하거나 굼뜰 수 밖에 없는 큰 질문, 시의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모색하고 대답하는 일을 중요한 일들을 훌륭한 저널리스트들은 해 낸다. 또 때때로는 특히 인문사회과학분야에서 학자들의 소심증 때문에 생기는 엉뚱한 문제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역할까지도 할 수가 있다. 남한에서 이런 면에서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는 진중권이다.
저널리스트는 무슨 자격시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양 있는 대중은 좋은 저널리스트와 그렇지 않은 저널리스트를 구분할 수가 있다. 반면에 학자는 사실은 엄격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 자격은 PhD 학위나 교수 직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Peer 에게 연구 결과를 발표할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의 증거로서의 연구 결과물이다.

물론 학자가 동시에 저널리스트도 될 수가 있다. 이 역할 바꾸기를 가장 잘하고 또 성공적으로 하는 사람으로 나는 MIT 의 폴 크루그만을 든다. 그는 클라크 메달을 받고 노벨상을 겨냥하는 대학자임과 동시에, 뉴욕 타임즈에 경제 시론을 쓰는 수준 높은 저널리즘 활동에도 종사하고 있다. 홍성욱이나 내가 한글로 쓰는 거의 모든 글은 학문이 아니고 저널리즘이다. 그 글이 Peer Review 를 겨냥해서 쓰여진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나 홍성욱은 영어로는 학문은 할 수 있어도 저널리즘에 껴들 능력은 없는 셈이고, 반면에 한글로는 저널리즘에 껴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그런데, 학자도 아닌 자들이 학자 행세를 하면 그건 돌팔이, 혹은 혹세무민이다. 남한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분이 김용옥 일 것이다. 그는 Peer 를 상대로 글을 쓰지 않고, 대중을 향해 글을 쓴다. 저널리즘으로서야 내가 별 할 말이 없지만, 그걸 "학자"의 저널리즘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된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정의상 말이 안 되는 것이 그는 Peer Review 를 겨냥한 연구 활동을 하는 일로 밥 먹고 살지 않는다.
내가 "이정우선생님" 에 대해 물어 본 것은, 또 하나의 김용옥 Copycat 이 혹시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도대체 학문에서 Peer 는 무얼까 를 가지고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 문제는 아마 소칼이 무명이다 아니다, 철학에 대해 무지하다 아니다. 라깡의 철학이 개똥철학이다 아니다 이런 문제들을 보는 손전등하나 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0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