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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의 발명과 소크라테스 이전 우주론의 몰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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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THESE
Date : 10-05-04 15:15
Hit : 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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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재부재님의 반박이 등장하면서 rathinker님과 불붙은 지식논쟁이 스켑렙을 달구면서 섣불리 논쟁에 뛰어들어 주화입마되는 것 보다는 제 스스로 올해의 화두로 결정했던 "진리탐구는 어떻게 하는 것언가"라는 과제를 던져 준 칼 포퍼Karl Popper의 번역서 중 일부를 옮기어 지식논쟁에 사용될 아카이브archive로 삼는 것이 제 자신에게 유익하겠다라는 판단에서 글을 옮깁니다.
동일한 글은 http://blog.daum.net/chakhan_prion/18 에도 있습니다.
원문에 없는 글번호를 단 이유는 논쟁을 위하여 차후 글인용을 위해서 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계몽에 관한 논문들
(2009. 칼포퍼, 이한구 등 번역)
序論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의 발명과 소크라테스 이전 우주론의 몰락 (1)
- 아마도 지식과 의견의 구별에 유일하게 반대한 듯이 보이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를 제외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사상가들은 모두 지식, 실재적 지식, 확실한 진리(saphes, alétheia, 그 후에 epistémé) 와 의견(doxa)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확실한 진리는 신적인 것이며 신들에게도 잘 알 수 있는 것이고, 의견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크세노파네스가 개선될 수 있는 추측으로 해석한 것이다.
- 이런 견해에 반기를 든 최초의 사람은 프로타고라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책의 시작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신들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 그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 우리는 모른다.' 나는 그의 인간 척도 명제, 즉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가 이것으로부터 도출된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신들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아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우리의 표준으로, 우리의 척도로서 취급되어야 만 한다.' 다시 말해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 명제는 단순한 인간적 의견과 신적인 지식에 대한 그의 선행 사상가들의 구별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표준이나 척도로서 인간의 지식을 취급해야만 한다.'
- 다른 사상가들도 비슷한 견해를 가졌으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은 모두 프로타고라스 이후에 올 수 있는데, 그 예로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고향인 압데라(Abdera) 사람,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를 들 수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에 따르면 데모크리토스가 그의 선생이었지만, 더 믿을 만한 자료에 의하면 그들의 순서가 뒤바뀐다. 프로타고라스는 아마도 파르메니데스의 합리주의에 반기를 든 가장 그럴듯한 경험주의자였다. 이점은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된다.
- 그렇지만 프로타고라스 이후,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를 때까지 중요한 사상가들은 대부분은 신들만이 지식을 갖는다는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선행 사상가들의 견해를 계속 지지했다. 이런 견해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아주 분명하다. 그것은 독단적인 플라톤에서도 더욱 더 명확한데, 플라톤의 독단주의는 주로 국가의 법률들에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이런 법률들이 성문화되기를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이 법률들은 엄격하고 절대로 변경할 수 없어야만 했다. 우리가 지금 자연과학이라 부르는 분야와 관련해서, 플라톤은 분명히 (예컨데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곳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닌 기껏해야 '진리 비슷한 것(truthlike)'뿐만 아니라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기껏해야 진리와 비슷한 것이다. 이 말은 통상 '개연적인'으로 번역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수학적 의미에서의 개연성과 진리 같음(truthlikeness)이라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진 개연성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나는 이 두 개념을 혼합하는 전통과 관계를 단절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수학자들이 '개연성'이란 말로서 의미하는 바를 바꾸고자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진리와 유사한(similiar to truth)'이나 혹은 '박진'(迫眞, verisimilitude)이란 용어를 특별히 이론들에 대해 사용한다. 플라톤이 사용한 말은 실제로 '닮음'이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진리와 닮은'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또한 '그림처럼 닮음이나 비슷함'과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이것이 그 의미의 뿌리인 것 같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들은 이런 종류의 지식만을 가질 수 있는데, 그는 그것을 거의 의견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의견이란 일상적인 용어로, 예컨대 그와 동시대 사람인 이소크라테스(Isocrates)는 '우리는 단지 의견만을 갖고 있다'라고 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오면 그 관계가 결정적으로 단절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지어 어떤 조율의 신학을 가진 유신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이상하게도 신적인 지식과 인간의 추측을 구별하는 전통과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그는 그가 안다고 믿었는데, 그 자신이 인식, 즉 증명 가능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다. 플라톤에게 과학적 가설이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지식, 증명 가능한 지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래로 지금까지 여전히 서양의 대다수 인식론자들에게 남아 있다.
-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한다고 하는 합리적인 전통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는 그가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인식의 이론, 즉 증명 가능한 지식의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논리학자였으므로, 증명 가능한 지식이 있다는 자신의 가정이 무한퇴행에 빠진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만약 이런 지식이 증명된다면, 이 지식은 논리적으로 이것 이외의 어떤 것으로부터 연역되어야만 하고, 이것은 다시 증명된 지식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또다시 이것은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연역되는 등 그 과정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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