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강좌에서 이영록 선생님의 '한 진화론자가 본 한의학' 강연 원고본입니다.
이선생님이 진행하신 본 강연의 전체적인 주제는 한의학이 다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치료와 설명이, 사실은 의학/(진화)생물학 연합군에 의해 더 우수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의 강연 파워포인트 자료와 아래한글 자료, PDF 자료도 앞으로 차차근 올리겠습니다.
* * *
한 진화론자가 본 한의학
이영록(漁夫)
진화론과 한의학, 별로 상관 없는 분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010년의 한국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 이유는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과학 교육을 받아 왔던 공학 연구자의 입장 외에,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한의학이 어떻게 보이는지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과학자’와 ‘의사’가 주는 뉘앙스를 질문하면 같다는 대답보다 다르다는 대답이 훨씬 많이 나올 것입니다. 저도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업무 성격으로 보아, 의사의 일은 ‘과학자’보다는 ‘공학을 전공했고,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와 비교해야 옳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의사의 일은 과학적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어떻게 반박을 하겠습니까? 심지어는 과학/공학을 전공한 사람도 제게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있으니 일반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아쉽게도, 이것은 일반인들이 두 직업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입니다. 공학적 기술을 ‘일반인을 위해 사용하는’ 엔지니어와, 의학 기술을 사용하는 의사가 하는 작업 방식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고, 모두 현대 과학에 튼튼하게 근거하고 있습니다.
제 직업은 사실상 고분자화학에 가까우며, 취업 이래 지금까지 만 15년째 고분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실제 경험한 사례가 설득력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사례는 DSC라는 분석기기에서 얻은 chart를 보고 고분자의 특정 현상이 보이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 다음장 그림 1 )
▲ 그림 1. 어느 고분자의 DSC chart
위 DSC chart를 제시하면서 고객이 한 질문은
Q ] 귀사의 DSC[1]로 저희 sample을 측정했더니 이런 chart가 나왔습니다. 조건은 10℃/min 승온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Tg[2]와 Tm(녹는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한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할 때 저는 그 고객에게 이런 질문을 했고, 대답을 들었습니다.
- Sample 재질이 무엇인가요? 대답] PET입니다.
- 측정 전 sample 외관이 어땠습니까? 대답] 하얗고 불투명합니다.
- DSC에 sample을 걸고 어떤 가열 과정을 거쳤습니까? 대답] 이 chart에서 가열한 것 외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정보를 갖고 제가 결론적으로 고객에게 답해 준 내용은;
A ] 구매 기록을 보니, 갖고 계신 DSC에 cooler가 달려 있군요. 온도를 300도 정도까지 올린 후 대략 5분 정도 그대로 유지하고, 그 후 10℃/min 도는 5℃/min 정도로 냉각해 보십시오. 만약 Tg, Tm이 옳다면, 냉각할 때 여기서 보신 것이 역방향으로(위로 모양이 뒤집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Tg, Tm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 아래 그림 2 참고 ]
▲ 그림 2. PET의 DSC chart; 냉각할 때는 점선 친 부분처럼, 가열할 때와 위아래가 ‘뒤집힌’ 모양이 나타난다.
저는 여기서 얼핏 보아 별로 과학적이지 않아 보이는 ‘몇 가지 실제적인 확인 방법’만을 제시했고 직접 고객이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물론 아래에 적은 것처럼, 제가 ‘과학적’ 방식으로 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Tg는 polymer 내 chain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열운동을 하는 양상이 바뀌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개별 원자들이 진동 운동만 하다가, 수십 개 원자 수준의 병진 운동으로 바뀌기 때문에 발생하지요. 이 기본 수준에서 Tg를 확인하려면 아마 온도 조절이 되는 AFM이면 가능할 것 같군요. 이 장비는 서울 ***에 있다고 들었는데, 외부 sample을 의뢰 받아 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경우에 따라 몇 주 이상 걸릴 수 있고 비용이 sample당 수십 만원 대가 될지도 모르지요]. |
이 편이 더 과학적일지는 모르지만, 고객이 어느 편을 더 좋다고 생각했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러면 왜 ‘과학적’ 방법보다 ‘비과학적’ 방법이 더 나은지 질문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 이유는 바로 '설명해야 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객은 현재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빨리, 가능하면 가장 저렴하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지, 근본적인 문제부터 시간과 돈을 더 들여 재확인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실제 택한 방식은 현장에서 바로 최소의 시간과 비용으로 고객의 가설을 점검할 방법을 제안한 데 반해, '과학적 방식'은 그 점을 ‐ 시간과 비용을 ‐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번에는 일반적인 의사(임상의) 분들께서 어떻게 진단을 하는지 간단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Q ] 지금 제 피부가 이런데, 몹시 가렵습니다.
▲ 그림 3. 피부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환부 사진
의사 분들께서는 아마 첫 단계로 문진(질병의 상황 문답)을 시도하실 것입니다.
- 언제 주로 이러십니까? 주로 겨울하고 여름입니다.
- 자주 씻는 편이신가요? 네. 하루에 한 번… 뜨거운 물을 좋아합니다.
- 혹시 작은 물집이 생기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피부 상태 및 문진, 그리고 전문의가 되는 과정에서 배운 것에 근거하여 진단과 처방을 내립니다.
A ] 이것은 자극성 피부염이라고 합니다. 우선 이 크림(steroid 저농도 함유)을 드리겠습니다. 하루 1~2번 바르셔요. 그리고 너무 뜨거운 물은 피부를 자극합니다. 전혀 안 씻을 수는 없겠지만, 미지근한 물을 사용해 주십시오. 혹시 2~3일 내에 효과가 없으면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십시오.
보시다시피, 저 같은 엔지니어와 의사(임상의)의 판단 과정은 사실상 동일합니다.
어떤 문제를 다룰 때 엔지니어와 의사는 모두 자신이 배워 아는 기초 과학 지식을 기반으로, 관찰하고 있는 대상이 보여 준 단서를 기반으로 원인을 추측한 후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탐정식 추론 방식’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둘의 업무 방식이 ‘문진 – 판단 – 처방 – 사후 점검’으로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후 결과를 보아 첫 추측이 잘못되면 수정하여 예상 경로를 바꾸는 식으로 답을 찾아가지요.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은 이미 검증을 마친 기초 과학에 근거합니다. 기초 과학에서는 어떤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진이 빠질 정도로 철저히 검증하고 들어간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더 정밀한 관측 수단이 나오면 다시 검증합니다. 고전 역학에서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이 나온 이유도, 관측 기술이 발전하면서 원자 규모 및 광속에 관계된 측정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초 과학의 높은 신뢰도는 철저한 검증 때문입니다. 이 기초 과학의 엄격함이 제가 예로 든 화학공학과 의학의 신뢰도를 보장해 줍니다.
이 두 집단의 업무 방식이 비슷하게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근본 이유라면 업무의 기본 정신이 위에서 말했듯이 “(일반인을 상대로) 고객의 문제를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해결한다”라는 것입니다. 엔지니어가 시간을 끌면 고객이 금전적 손해를 볼 것이며, 의사가 시간을 끌면 고객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똑같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학자들처럼 기초 이론을 꼼꼼히 확인해 나가기보다는, 이미 잘 확인된 사실에 기초하여 판단을 빨리 내리는 편이 절대적으로 낫습니다.
하지만 ‘판단을 빠르고 정확히 한다’는 결코 쉽게 될 일이 아니지요. 바둑의 고수들이 특정 패턴의 문제를 일일이 추론하지 않고 정석이나 기보를 공부해 세부를 외워 버리듯이, 엔지니어들이나 의사들이나 빠른 판단력과 기술을 몸에 익히기 위한 직업 훈련은 반복적이고 고됩니다. 일반의 오해처럼 비과학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빠른 판단을 위해서 학업 과정에서 기존에 과학적으로 정립된 사실들을 머리 속에 넣고 출발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엔지니어'와 의사들입니다.
이런 '표준화'된 엔지니어와 의사의 교육 과정이 그들에게 최소한의 필요한 지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하여 그들의 평균적인 '품질'을 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질의 차이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 엔지니어와 의사의 일 성격을 요약하면, ‘이미 배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되, 경험에 의거하여 가장 정답에 가까운 아이디어를 가장 빨리 제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것은 사실 art와 가깝지요. 경험은 사람마다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으며, 노력과 재능에 따라서 개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은 당연히 다릅니다. 이 때문에 불가피하게 엔지니어와 의사들 사이에는 능력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이것이 '그들은 비과학적이다’ 라거나 ‘그들의 추론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돌팔이)'란 말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이 두 직업의 ‘과학성’은 ‘실제적인 기술(skill)’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평시에 일할 때에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업무 방식인 ‘문진 – 판단 – 처방 – 사후 점검’의 근거가 모두 기초 과학에 근거한다는 점이 이 두 직업을 ‘과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제가 고객과 한 문답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 Sample 재질이 무엇인가요? --> 고분자의 결정화 이론(고분자 물리학)및 재질 별 결정화 특성(고분자 화학 및 물리학)
- DSC에 sample을 걸고 어떤 가열 과정을 거쳤습니까? --> 고분자 가공 이력(고분자 물리) 점검
A ] 구매 기록을 보니, 갖고 계신 DSC에 cooler가 달려 있군요. 온도를 300도 정도까지 올린 후 대략 5분 정도 그대로 유지하고, 그 후 10℃/min 도는 5℃/min 정도로 냉각해 보십시오. 만약 Tg, Tm이 옳다면, 냉각할 때 여기서 보신 것이 역방향으로(위로 모양이 뒤집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Tg, Tm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 Tg의 가역성(고분자 물리학)을 이용. 미시적 고분자의 분자 운동 이론에 근거
피부염 문진에서 ‘작은 물집’이 있었다면 의사는 아마도 진균이 보이는지 물집 내용물을 현미경으로 검사하여 진균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을 활용했을 것입니다. 스테로이드는 근본적으로 면역을 억제하기 때문에 염증을 가라앉히는데, 이것은 면역학 내용이지요. 둘 모두 더 기초적인 이론들, 각각 고분자 물리학과 면역학(및 생물학)에 기초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 본 것처럼, 화학공학과 의사라는 두 직업이 모두 현재 탁월한 성과를 보여 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추론의 기반이 되는 ‘기초 과학 지식’이 건전하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고객들에게 말할 때는 고분자공학, 고분자화학, 기계공학 등에 일차적으로 근거하고, 근본적으로는 이들은 화학,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물리학과 수학에 수렴합니다. 엔지니어들의 지식은 이런 위계 구조가 기반입니다. 아래에서 화학공학의 예를 보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몇 가지 과목들이 – 유기화학, 물리화학, 분석화학 등 – 결국에는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기초 학문에서 뻗어 나오고 있습니다.
▲ 그림 4. 화학공학; 위계 구조의 실례
그러면, 의학은 어떤 학문에 근거한 위계 구조를 갖고 있는가요?
공학과 마찬가지로 가장 근본적 단계에서는 물리학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화학 반응은 원자 주변에 있는 전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라 양자역학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화학의 모든 것의 심층은 물리학으로 귀착됩니다. 한 예로, 약의 유효 성분을 분석하고 화학적으로 세포에 어떤 효과를 주는지 조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화학, 근본적으로 물리학 얘기입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해부학 시간에 배웠던 인체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들은 생물학적 사항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인간은 경추 수가 7개라든지, 간과 심장은 하나고 신장은 2개라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요약하여, 의사들이 행하는 실제 기술은 일차적으로는 (생)화학과 생물학, 근본까지 내려가면 모두 수학, 물리학(화학)과 ‘진화’ 생물학에 의존하는 셈입니다. 이에 의거하여, 몇 가지 과목에 대해 의학의 위계 구조를 그린다면
▲ 그림 5. 의학; 위계 구조의 실례
제가 ‘진화’를 강조해 놓은 이유는, 생명체가 근본적으로 진화를 통해 현재처럼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사람도 물론 포함해서 ‐ 의학에서도 진화적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불행히도 불과 20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아직도 '치료가 어렵긴 해도, 결국 노화는 치료할 수 있는 일종의 질병'이라는 인식이 꽤 폭넓다는 것에서도 분명합니다. 세균이 항생물질에 대해 진화적 반응으로 저항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항생제가 등장했을 때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례도 있었지요. 현대 의학이, 그리고 현장에서 의업을 다루는 일선 의사 분들이 진화적인 관점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면, 한의학은 어떻습니까?
한의학이 어떤 이론 체계를 갖고 있는가 제대로 알아보려고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그다지 명쾌하게 잡히는 것이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리고 주로 적용하는 ‘이론’이 사람마다 꼭 동일하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제가 아는 한의학 전공자에게 물어 본 적도 있습니다만, ‘철학과 비슷해서 뭐라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는 대답만 들었지요.
현장과 가장 밀접한 층위에는 한의학의 진단, 약학, 그리고 침술 등이 있을 것이며, 이들은 기혈론에 근거하는 듯하며, 제일 밑바닥에는 음양오행이나 이와 비슷한 이론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이게 음양오행이건 뭐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판단을 내리는 심층에 다른 순수(또는 응용) 과학이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지요. 저는 음양오행하고 현대의 기초 과학의 접점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 그림 6. 한의학; 위계 구조(?)
다시 강조합니다만, ‘과학성’을 판단하는 핵심은 ‘실제 기술(skill)’이 아니라, 그것을 받쳐 주는 심층에 있는 체계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사기꾼 또는 돌팔이’와 ‘(과학적인) 의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실제 기술이 얼마나 좋은가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판단을 좌우하는 기반 과학 체계라는 것입니다. 한의학의 기반이 현대의 기초 과학처럼 엄격하게 검증을 거친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이 “한의학의 기술이 모두 쓸모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 주십시오. 현대 의학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민간 처방에서 신약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것이 한의학의 기초가 논리적이고 굳건하다는 입증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물론 한의학 지지자들은 입증이라고 많이 주장합니다만) 바로 이것, ‘기술의 심층’입니다. 시행 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맞는 기술이 당연히 나오겠지요. 하지만 요즘 ‘사람 몇 명 죽였더니 이제 좀 알겠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공감을 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기초 이론이 별로 믿을 만 하지 못한 한의학 쪽의 처방과, 기초 이론이 든든하게 검증되어 있는 의학 쪽의 처방 중 어느 편이 사람을 살릴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서는 말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기초 이론’에 근거한 신뢰도 평가 문제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와 B라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A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10%, B는 50%라고 합시다. 같은 문제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릴 경우, A와 B 중 어느 편의 말이 어느 정도 옳겠습니까? 직관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당연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추상적인 문제를 잘 풀지 못하는데, 진화적으로 사람은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3]
이 문제를 베이지언 매트릭스(Bayesian matrix)로 풀어 보겠습니다. A, B, 참말과 거짓말로 나누면 각각 네 가지 가능성이 나옵니다. 양편이 다 참말을 할 수도 있고 양편이 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데, 문제에서 ‘의견이 엇갈린 경우’라고 했으므로 이 가능성을 제외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즉 아래 그림에서 ‘zone 1’과 ‘zone 4’를 빼야 하지요. zone 2와 3만을 분석하면, B 편이 맞을 확률은 10%인데 반해(5%/50%) 틀릴 확률은 90%나 됩니다(45%/50%). 즉 이 경우에는 'A의 말을 듣는 것이 90% 옳다'가 정답이 됩니다. 다시 말해, B가 평소에 참말을 할 확률이 50%인데도 불구하고, A의 말을 듣는 것이 9배나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 그림 7. ‘A‐B‐참말‐거짓말’ 문제의 Bayesian matrix
위 문제에서 A를 ‘의학’으로, B를 ‘한의학’으로 놓으면 현재 대한민국 대중이 직면한 상황이 되겠습니다.[4]
지금까지는 주로 의학의 신뢰성이 어디서 나오는가와 한의학의 신뢰도가 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가를 얘기했습니다. 사실 한의학을 비판하는 데에는 이 점만 제대로 파고 들어가더라도 200%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의학 현실에서는 – 의사뿐 아니라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 아직 무엇인가가 2% 부족합니다. 그것이 오늘 제가 다루는 주제입니다. 바로 생물학 분야에서 진화론적 사항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입니다.
의사들이 학부‐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의업을 시행하고 계신 지금까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해 왔는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 인체의 구조 – 신경계, 면역계, 소화계, 호흡계, 내분비계, 배설계, 순환계, 운동계 등 – 그리고 임상 진단 및 판단 기법에 대해서는 (제가 위에서 말한 ‘기술 획득’을 위해) 지겨울 정도로 배우고 실습을 했겠지만, ‘왜 인체가 현재의 모양이 되었나’ 든가 ‘왜 인간이 어떤 경향의 행동을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라면,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사들이 배운 것들은 컴퓨터의 하드웨어에 상당하는 부분으로, ‘컴퓨터의 구조, 각 부분간 연결 장치, 입출력 장치..’ 등이지만, 사실 컴퓨터가 어느 특정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 못지 않게 소프트웨어도 중요합니다. 하드웨어 중 하나인 CPU가 초당 1000개의 데이터만 다룰 수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초당 백만 개의 데이터를 다루도록 프로그램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그 반대 경우도 비효율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데 하드웨어의 문제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양편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진화생물학은 지금까지 의사들이 (그리고 대부분의 학교 생물 과정에서) 공부해 오던 인체의 하드웨어 사항에다 소프트웨어적인 것들을 보완해 줍니다. 하드웨어의 각 부분이 ‘현재 왜 그렇게 되었나’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진화생물학입니다. 우선 진화생물학은 진화의 과정에서 생물의 어떤 특징이 다음 중 무엇에 해당하는지 설명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 적응; 특정 문제에 대응하여 성공적인 번식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진화된 해결책[5]
e.g. 날기 위해 진화한 새의 날개, 빛을 감지하는 동물의 시각계…
- 부산물; 적응 과정에 수반된 특성. 보통 개체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해로운 경우를 이렇게 칭함
e.g. 인간의 배꼽. 탄생 전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탯줄이 떨어진 자리에 생긴다.[6]
- 임의적 변화(noise); 돌연변이를 포함해 발생 때의 여러 우연한 일에 따라 생김. 개체의 생존에는 이롭거나, 중립적이거나, 해롭거나 모두 가능
e.g. 배꼽의 구체적인 모양[7]
어떤 생물학 현상에 대해 연구할 때 이 셋 중 어느 범주인지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의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 그림 8. 전 생물계의 진화적 계보(source; Wikipedia)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라면, 진화생물학적 사고는 단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모든 생물은[8]
- 유전 물질로 DNA(몇 예외에서는 RNA)를 사용한다.
- 이 유전 물질의 정보를 ‘번역’해서 단백질을 만들어 낸다.
위 사항이 공통입니다. 이것은 현존하는 전 생물의 조상이 존재하고, 그 조상에서 모든 생물이 진화에 의해 갈려 나왔다고 주장해야 간명하게 설명이 됩니다(그림 8 참고). 인간도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한 생물종’일 뿐이며, ‘하드웨어’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생물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진화의 원리가 모든 생물에 적용된다는 점을 확인해 줍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공통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음양오행이 각 생물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요? 진화생물학적 사고는 한의학의 바탕에 있는 비과학적 사고를 드러내 줄 수 있습니다.
일부 분들의 소위 '과학'엔 '생명' 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 있는가?? 자기 재현성, DNA 유전자 정보의 전달, 물질의 대사 이런 원론적인 수준에 머무는 이야기 말고, 인간, 한 사람의 성인(한의학적인 용어로는 바로 平人!! )이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하는 이론이 있는가?? 지금 당장의 현실 속에서,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아파하고 감정을 갖고 욕심을 부리고 잘못된 생활 습관을 갖고 … 그 병이 낫고 하는 모습에 대한 총체적인 생명관(生命觀) 이 있는가??
한의학에는 있다. 인간이 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성행위하고 먹고 자고 마시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과, 균형 잡힌 음식,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병이 생기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주 상세하게 되어 있다.[9]
현대 진화 생물학이 아주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제시한 출생, 성장, 성행위.. 기타 얘기들은 전부 진화생물학에서 충분히 설명해 놓은 것들입니다. 과학에서 전혀 못 하고 있는 양 얘기하면 좀 곤란하지요. 제가 보기엔, 이 분은 이 문제들이 전형적인 진화생물학적 문제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야 어쩔 수 없습니다만, 한의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맞을 가망이 거의 없어서 문제지요.
진화생물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 진화생물학적 사고 방식을 설명할 때 필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자동차가 왜 움직이는지를 누구에게 물어보는가에 – 자동차 수리공인가 아니면 물리학자인가 – 따라 답변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자동차 수리공은 당연히 기계적인 관점에서 시동을 걸면 전기에너지가 솔레노이드와 시동기를 거쳐 어떻게 엔진을 움직여 변환되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동차에 연료가 충분하면 엔진이 작동하고 엔진이 바퀴에 연결되어 자동차는 움직인다는 식으로 설명할 것이다. 반면 물리학자는 가솔린이 연소되면서 어떻게 화학 결합을 끊어 운동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이 운동에너지가 어떻게 다양한 기계 장치를 작동시키는지 설명하려 할 것이다. 둘 다 정답이다. 단지 설명 수준이 다를 뿐이다.
이런 구별은 중요하다. 수리공은 앞서 설명한 원리에 따라 차를 고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물리학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떤 새로운 기계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 시절 여름 한때 트럭을 운전한 경험이 있어서 이것을 잘 안다. ‘왜그’라는 이름의 그 수리공은 서투른 솜씨로 엔진을 고칠 때마다 엔진이 망가진 원인을 아는 나를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엔진 속을 만지작거리며 물리학 주문을 중얼중얼 외우곤 했다. “연료, 불, 공기가 필요해… 연료, 불, 공기.” 반면 물리학자는 운동 역학으로 차가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점화 플러그를 찾아 고치지는 못할 것이다.
진화생물학자는 수리공의 답변을 근접적(proximate) 또는 기계론적(mechanistic) 대답이라고 하고, 물리학자의 답변을 인과론적 또는 궁극적(ultimate) 대답이라고 한다.[10]
진화생물학자의 특징은 항상 위에서 말한 ‘궁극적 원인(ultimate cause; 또는 궁극인)’과 ‘근접 원인(proximate cause; 또는 근접인)’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자로 답을 합니다.
한 가지 예로, 일벌에 쏘이면 왜 아픈가 하는 의문에 어떻게 답하는가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 그림 9. 일벌(source; Wikipedia)
1. 일벌의 독에는 멜리틴(mellitin)이 들어 있으며, 이것은 포스폴리파제 A2를 활성화하여 인지질 막을 분해하여 아라키돈산이 방출되게 한다. 이 결과로 염증과 통증이 일어난다.
2. 벌은 일벌들의 산란관 및 난소를 독침과 독 분비선으로 전환시켰으며, 적이 왔을 때 독침을 이용하여 (일벌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여왕을 보호하려는 용도로 이 독침이 진화했다. 적에게 효과적으로 고통을 주어 여왕을 보호하는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멜리틴이 아니라 진화적 역사에서 사용 가능한 어떤 물질이라도 상관 없다.
1번은 근접인이고 2번이 궁극인이지요. 양편 모두 해당 설명 수준에서는 옳은 서술인데, 생명 전체를 보는 관점에서는 2번이 더 ‘심층’에 있는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가 변화해 가는 원동력(driving force)은 바로 진화적 압력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체가 ‘번식’을 할 때,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유전 물질밖에 없습니다. 가령 인간의 경우에는 난자와 정자로 전해지는 DNA와, 난자의 세포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뿐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자손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전 물질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다수를 점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며, 소위 ‘신체’는 유전 물질을 더 많이 퍼뜨리도록 행동할 것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논리를 가장 쉽게 설명한 최초의 대중 해설서가 리처드 도킨스의 그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입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신체를 포함하여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생명체 그 자체는 충분히 자손을 남긴 후에는 죽건 말건 유전 물질의 입장에서는 상관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유전 물질의 입장에서는 생명체의 몸은 1회용 소모품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종류의 복제자(DNA라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 기계들이다… 신체는 유전자가 스스로를 보존하여 변화하지 않기 위해 만든 수단이다.[11]
인간의 두뇌와 박테리오파지의 ‘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답 ] DNA를 위한 일회용 장치.

▲ 그림 10. 사람의 뇌와 박테리오파지의 ‘몸체’(source;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