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alleviate님의 글에 스크류바님이 소개하신 권태호 기자의 글 자체는 워낙에 진부한 내용이라 애초에 별로 읽을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권태호 기자가 훌륭한 보수의 사례로 들었던 역사적 인물들의 일화가 다 엉터리라서 이거야 원;; 이러고도 자기 이름 석자 내걸고 기사를 쓰나?
혹시라도 낚이는 독자분들이 있을까봐 포스팅합니다.
[(전략) "결국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도덕성과 자기희생 여부로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다. 모든 아테네 정치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갈 때, 홀로 광장에 나서 쿠데타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는 이가 있었다. 솔론(기원전 630~560)이었다. 측근들이 말리자, 그는 "나는 늙은 나이를 믿는다"고 말했다. 이게 보수다. 아들이 없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아그리파를 최전선에 보냈다. 아그리파는 전사했다. 황제는 외손자 루치오, 가이우스도 반란이 일어난 아르메니아에 보냈다. 외손자들도 모두 전사한다. 이게 보수다. 신라 품일 장군은 난공불락 계백 앞에서 16살 아들 관창을 사지로 보낸다. 이게 보수다.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이방원을 만나러 선죽교로 향하던 밤, 등불 들고 말 고삐를 쥐는 하인을 물린다. "놔둬라. 나 혼자 가마." 하인의 목숨을 살리려는 마음이었다. 이게 보수다. 최익현은 을사조약 이후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쓰시마섬에 보내진다. 그는 "적군의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하다 숨진다. 이게 보수다. 생각은 달라도 존경할 수 있었던, 그 '아름답던 보수'는 다 어디 갔나?" (후략)]
완전 틀린 내용 투성이에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전부 어거지입니다.
1. 일단 솔론의 경우를 보죠. 솔론은 왕이 통치하던 아테네에 금권정치 형태로 초기 민주주의 국체를 창조해낸 반신화적인 인물입니다.(스파르타로 치면 리쿠르고스 같은 인물이죠)
그와 유명한 참주 페이시스트라투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둘은 어머니끼리 사촌인 친척이라고 합니다.
고대 아테네에선 페이시스트라투스가 솔론의 에로메노스(eromenos - 측근에 데리고 다니며 동성애 관계인 미소년을 말함)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 모양입니다.
[According to some ancient authors Solon had taken the future tyrant Peisistratus as his eromenos. Aristotle, writing around 330BC, attempted to refute that belief, claiming that "those are manifestly talking nonsense who pretend that Solon was the lover of Peisistratus, for their ages do not admit of it," as Solon was about thirty years older than Peisistratus.[143] Nevertheless the tradition persisted. Four centuries later Plutarch ignored Aristotle's skepticism[144] and discuss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as did Aelian a hundred years later still:
And they say Solon loved [Peisistratus]; and that is the reason, I suppose, that when afterwards they differed about the government, their enmity never produced any hot and violent passion, they remembered their old kindnesses, and retained "Still in its embers living the strong fire" of their love and dear affection.[145]
Despite its persistence, however, it is not known whether the account is historical or fabricated.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 tradition presenting a peaceful and happy coexistence between Solon and Peisistratus was cultivated during the latter's dominion, in order to legitimize his own rule, as well as that of his sons. Whatever its source, later generations lent credence to the narrative.]
위키에 보면, 후세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나서서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투스가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부정했었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죠.
더구나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투스의 1차 정권 당시에 죽지도 않았습니다. 위의 권태호 기자의 이야기는 아마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일화인 것 같은데, 인용하려면 전체 일화를 제대로 인용해야지요.
애시당초 페이시스트라투스는 빈민층을 등에 업고, 솔론이 확립한 과두정치에 가까운 금권정치를 뒤엎은 것이라, 이걸 권태호 기자가 현대적 느낌이 다분한 쿠데타란 용어로 부른다면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더구나 위의 일화 다음에 이어지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내용은,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투스는 왕위에 오른 다음 솔론을 각별히 예우하며 여러가지를 상의하며 어떤 경우는 승인도 받았다.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투스의 시대에도 오랫동안 살았다고 헤라클레이데스는 말한다. (후략)'
이런 내용입니다;; 도대체가;; 위에 솔론 위키 링크 내용에서도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투스 시대에도 천수를 누리며 잘 살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아름다운 보수의 사례에요? 정치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투스 사이에 오고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면 모를까.
2. 아우구스투스의 경우를 보죠.
일단 아그리파는 기사 내용대로 그의 사위가 맞기는 맞는데,
'아들이 없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아그리파를 최전선에 보냈다. 아그리파는 전사했다.'
이딴 식의 표현은 황당하다는 것입니다. 틀리기도 했구요.
아그리파는 사위이기에 앞서서, 아우구스투스의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이며, 동료이자 친구, 심복인 사람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대권을 잡은 후에는 계속 같이 집정관에 취임했던 사람이고, 평생 전장을 돌아다닌 사람입니다. 더구나 아그리파는 전사하지도 않았어요.
다음에서 제공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아그리파 항목입니다.
[(전략) BC 13년에 아그리파의 호민관 임기는 다시 갱신되었고 이때는 확실히 임페리움 마유스의 지위를 받았을(또는 갱신) 것이다. 그는 판노니아에 분란이 일어나자 출정을 해야 했으나 BC 13~12년 혹독한 겨울 추위로 치명적인 병에 걸려 BC 12년 3월에 죽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동료였던 그를 기리는 장례연설을 몸소 했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그 연설의 일부분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내린 온갖 영예로운 찬사를 당연히 받을 만했다. 아그리파가 없었더라면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후략)]
최전선에 보내기는 뭘 보내요? 출정하려고는 했으나 병사했대잖아요;;
'황제는 외손자 루치오, 가이우스도 반란이 일어난 아르메니아에 보냈다. 외손자들도 모두 전사한다. '
이것도 엉터리에요. 도대체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일간신문 헤드라인에 나는 기사의 모든 근거가 다 엉터리인지;;
일단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외손자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는 전사하지 않았어요. 둘다 후계자 수업 받던 중에 어리버리 죽었어요.
가이우스 같은 경우 아르메니아 왕국에 외교교섭하러 갔다가 실패한 다음, 크게 낙심하여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응석부리며 직위를 팽개치고 소아시아 여기저기를 지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죽었어요.(22세)
루키우스 같은 경우 17세에 군대 경험 쌓아줄려고 아우구스투스가 에스파냐로 파견했는데, 가는 길에 마르세유에 장기간 머물다가 18세로 병사했어요. 전사도 아니거니와 아르메니아에서 죽지도 않았어요.
이미 40대 중반의 장성한 의붓아들 티베리우스가 있는 판국에, 굳이 혈연으로 이어진 외손자들에게 대권을 물려주고 싶어서 어린 나이에 과분한 임무를 맡기는 노욕을 부린 아우구스투스가 추한 거지 도대체가 이게 무슨 '아름다운 보수'에요?
3. 품일이 관창보고 죽어서 군의 사기를 올리라고 한 것.
이게 무슨 아름다운 보수에요? 거참 욕나옵니다. 권태호 기자 이 사람 가미가제도 찬양할 양반이로군요?
이건 눈쌀이 찌푸려지는 잔인함이지 찬양할 대상이 아니에요. 더구나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침략한 전쟁이잖아요? 방위전쟁도 아니고 말이죠.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관창, 반굴의 죽음 이 부분에서 김유신의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을 얼마나 욕했는지 모릅니다.
품일이 관창에게 무슨 특공대나 선봉의 임무를 맡긴 것도 아니고, 그냥 필마단기로 돌진해서 죽어라, 그래서 너의 죽음으로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라고 한 건데 이게 얼마나 야만적인 일입니까? 아들 목숨이 지 껍니까? 뭐가 아름다운 보수에요?
4.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이방원을 만나러 선죽교로 향하던 밤, 등불 들고 말 고삐를 쥐는 하인을 물린다. "놔둬라. 나 혼자 가마." 하인의 목숨을 살리려는 마음이었다. 이게 보수다.'
이것도 엉터리에요. 무슨 야사에나 나오는 근거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어이구 한심해서 나 원;; 해당 부분 조선왕조 실록을 좀 보죠.
[영규·조영무(趙英茂)·고여(高呂)·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公)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하인 얘기가 어디 나옵니까? 더구나 정몽주는 권태호 기자의 말처럼, 이방원 만나러 가다가 죽은 것도 아니고, 이성계가 어쩌고 있는지 염탐하러 문병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었어요.
더구나 대범하게 죽은 것도 아니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죽었구요.
도대체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인하고 정몽주하고 둘 밖에 없었는데 저렇게 둘 다 죽었다면 누가 있어서 둘의 저런 대화를 기록했겠어요? 그냥 어디 야사에나 나오는 미담에 불과합니다. 야사에는 그 하인의 이름이 김경조라고 되어 있는 모양인데... 의미없는 이야기죠. 위인전기에 그냥 인심좋게 넣어줄 미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간신문 칼럼에 근거랍시고 들이댈 수준의 일화는 아니란 겁니다.
5. 최익현
최익현이 단식하다 죽었는데 어쩌라는 것이죠? 그게 보수와 무슨 상관인지... 최익현은 구한말에 세계 정세를 알지 못하고 개화에 극력반대했던 자입니다. 그게 아름다운 보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아합니다.
그나마 다행히 권태호 기자가 들었던 역사적 사례 중에서 틀리지는 않은 유일한 사례네요.
참 한심합니다.
별 내용도 없는 맨날 그 내용이 그 내용인 레퍼토리를 지치지도 않고 또 지저귀는 것은 그렇다쳐도, 자기 주장의 근거라고 들이댄 역사적 인물들의 사례가 다 저렇게 엉터리니 참 일간지 기자 쉽게 해먹는군요.
아마추어 역사 애호가인 저 정도 수준의 듣보잡에게 이렇게 다 들통날 정도니 참 한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