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인문학의 갈등 논의가 나왔다하면 빈번하게 거론되곤 하는 C.P.Snow 의 책 <두 문화(Two Cultures)>에서 아주 인상깊었던 대목 몇개만 스크랩해서 소개합니다.
<두 문화>는 20세기 중반 영국 지식계의 문화, 특히 과학자와 인문학자의 습성 차이에 대한 아주 날카로운 관찰을 담은 인류학 보고서지요. 널리 회자된 책임에도, 또 제목과는 달리, C.P.Snow 는 과학과 인문학을 양시양비론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인문지식인들을 아주 맹렬하게 질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아마 아래 대목을 읽고 스켑렙에서라면 스트레스 풀릴 분이(쌓일 분만큼이나) 많을 듯. ^^
과학자를 옹호하는 C.P.Snow 의 역할은 요즘 John Brockman 이 대신 떠맡아서 아주 잘 해주고 있죠.
인문학자들의 무식에 대해서 생물학계의 최고 권위 중 한 사람이었던 Ernst Mayr 역시 같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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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하는 시간은 과학자들과 함께 지내고 밤에는 문학하는 동료들과 어울리는 날들이 많았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었다. 물론 막역한 과학자와 작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글로 썼고, 내 스스로 "두 문화(Two Cultures)"라고 명명한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이러한 무리의 친구들과 함께 살았다는 데도 기인하지만 그보다는 두 그룹 사이를 규칙적으로 왔다갔다 했다는 것이 더 큰 이유가 된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느낌마저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이 두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식 수준이 비슷하고, 같은 인종이고, 출신 성분도 크게 다를 바 없고, 거의 같은 수입을 가지면서도 교양, 도덕, 심리적인 경향에 있어서도 거의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피차간의 접촉을 끊은 채 버링턴 하우스나 사우스 켄싱턴에서 첼시로 가는 대신, 바다 건너 저편으로 가고자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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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좀 진지한 이야기 한 토막을 할까 한다. 나는 스미스로 믿어지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옥스퍼드 고전문학과의 한 쾌활한 교수가 멀리 케임브리지의 회식에까지 왔다가 어떤 일을 당했다는 식의 유쾌한 이야깃거리는 아니다. 아마 1890년대의 일이었을 것이다. 장소는 세인트 존스 아니면 트리니티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스미스는 그때 학장인가 부학장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모두 화제에 끌어들이는 것을 좋아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에 곧장 자극을 받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맞은편 사람에게 옥스퍼드 식의 재미있는 농담을 했으나 상대방은 투덜거릴 뿐이었다. 그래서 오른쪽에 앉은 사람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해보았으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처음 상대편 사람들이 또 한 사람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스미스씨가 한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에 스미스도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 어색한 장면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학장은
“오, 그분들은 수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수학자들에게는 말을 건네는 법이 없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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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실생활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겠다. 이 두개의 극단적인 그룹의 한쪽에는 문학적 지식인(the literary intellectuals)이 있다. 그들은 아무도 그것을 크게 문제삼지 않기 때문에 마치 달리 지식인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케임브리지의 저명한 수학자 하디가 1930년의 어느 날 당혹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나에게 들려준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하고 있다.
“지적(intellectual)이라는 낱말이 요즘에 와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 유의해본 적이 있습니까? 러더퍼드, 에딩턴, 디랙,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어떤 새로운 의미 규정이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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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의 대부분은 개인의 조건이 비극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조건이 비극적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나온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희망의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독하고, 누구나 홀로 죽기 마련이며, 그것은 우리가 다툴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조건 가운데는 운명이 아닌 것이 얼마든지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동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식량이 부족하여 천수를 누리지 못한 채 죽어간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바로 사회적 조건인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고독을 달관함으로써 도덕적 함정에 빠지게 된다. 즉, 뒤를 향해 앉아서 사실에 등을 돌리고, 자기 자신의 비극에 안심입명하여 다른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다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보다는 이 함정에 빠지는 비율이 적다. 과학자는 혹 무엇을 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를 몹시 찾고 싶어 하는 성미의 소유자인 동시에 그것을 해낼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과학자의 진정한 낙천주의이며 이러한 낙천주의야말로 과학자 아닌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
한쪽 극의 과학적 문화는 비단 지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인류학적인 의미에서도 진정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과학 속에서도 각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필요도 없고 또 물론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생물학자가 현대 물리학에 대해서 아주 모호한 개념을 갖는 경우는 흔히 있지만, 공통의 태도, 행동상의 공통적인 기준과 패턴, 공통의 연구 방법과 가정 설정 같은 것이 있는 법이다. 이러한 경향은 놀랄만큼 깊고 넓게 과학자들에게 침투해 있으며 그밖의 정신적인 패턴 예컨대 종교라든지 인종과 같은 패턴을 궤뚫고 있다.
통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문화의 사람들보다도 과학자 가운데서 더 많은 것 같다. 비록 종교적인 사람의 수도 많고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더욱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또한 과학자 대부분은 자기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데도(이 점도 젊은 사람들에게 공통된다) 통계적으로 보면 공개적인 정치에 있어 좌익 성향의 과학자들 수효가 약간 더 많다. 영국이나 아마 미국에 있어서도 다른 분야의 지식인과 비교해 볼 때, 다수의 과학자들이 빈곤한 가정 출신이다. 그러나 과학자의 행동과 사상의 전 영역에 걸쳐 그런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과학자가 행동이나 정서 생활에서 취하는 태도는 종교, 정치, 계급에 대해서 같은 레테르가 붙은 비과학자보다는 그것을 달리하는 과학자에 더 가까운 것이다. 만일 속기와 같은 실수가 허용된다면 과학자는 미래를 타고났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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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적인 사회를 통해서 물리학자의 세계로부터 문학적 지식인의 세계로 옮겨 가는 길목에서 온갖 색조의 감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과학의 전적인 몰이해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몰이해는 우리들의 생각보다는 더 광범위하게 전통적인 문화 전체에 비과학적인 기미를 풍기게 하며, 이는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반과학적인 전환점이 되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쪽 극에서 느끼는 공감은 다른 쪽 극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과학자가 타고나면서 미래라는 것을 지니고 있다면 전통적 문화는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반응을 보인다. 전통적 문화는 과학적 문화의 출현으로도 별반 상처를 입지 않고 여전히 서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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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우수한 과학자 중에는 비전문적인 문제에도 관심과 여력을 가진 이들도 더러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문학인들의 화제에 오를만한 작품들을 모조리 읽은 사람도 더러 만났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들 대부분이 (우리가 그들이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를 조사해 보았을 때) 이런 식으로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글쎄요, 디킨스를 좀 읽어보려고는 했습니다만.” 마치 디킨스가 릴케와 같은 일종의 이상한 비법적(秘法的)인 것, 뒤얽히고 과히 쓸모가 없는 작품의 작가라는 듯이 말한다. 사실 이것이 바로 과학자의 디킨스관인 것이다. 디킨스가 문학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든 전형으로 탈바꿈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우리들의 작업을 통해서 얻은 가장 기묘한 결과의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디킨스를 읽을 때, 또 우리들이 존경하는 많은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과학자는 자기 모자에 손을 얹고 전통적 문화에 그저 인사를 보내는 정도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강력하고도 엄밀하며 또한 언제나 활동적이다. 그들의 문화 속에 들어 있는 논의는 문학적인 논의에 비하면 보다 엄밀하고 대개의 경우 그 사상적인 수준이 더 높다. 과학자들은 문학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쓰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하며 그들이 논하는 “주관적”, “객관적”, “철학”, “진보”니 하는 말들을 비록 우리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들 나름대로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사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자들은 매우 지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문화는 많은 점에서 정확하며 훌륭한 것이다. 그들의 문화에는 하나의 예외 – 그것은 중요한 예외이지만 – 인 음악을 제외하고는 예술적인 요소가 별로 없다. 말의 교환과 열띤 논의, LP 레코드, 천연색 사진, 귀 그리고 어느 정도 눈을 사용한다는 것, 그저 이런 정도라고나 할까. 독서도 거기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어떤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받은 한 친구는(아마 그 사람은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낮은 수준의 부류에 속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책말입니까? 저는 책을 차라리 도구로 사용하기를 좋아하죠.”라고 단호한 어조로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대체 책이 어떤 도구의 구실을 한다는 것인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망치라든지 원시적인 땅파기 도구라도 된다는 것일까.
그들이 읽는 책은 아주 적었다. 그리고 대개의 문학적인 사람들에게는 버터를 칠한 빵과도 같은 소설, 역사, 시, 희곡 분야의 책에 대해서는 거의 지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가 삼리적, 도덕적, 사회적인 생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 생활에 대해서 그들은 오히려 우리들보다 더 관심을 갖는다. 도덕적인 생활면에서도 현재의 지적 그룹 가운데서는 가장 건전하다고 할 수 있다. 과학 그 자체 속에는 도덕적인 성분이 들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학자는 도덕적인 생활에 있어서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린다. 심리적인 것에 대해서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거기까지 오는 시간이 늦는 것 같다. 과학자들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통적 문화의 문헌 전체가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태도는 잘못이며 그 결과 그들의 풍부한 이해 능력이 저하되고 마침내는 자기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런데 또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가. 그들도 무력해지기는 마찬가지지만 워낙 자존심이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파급 효과는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전히 전통적 문화가 “문화”의 전체인 양 그리고 마치 자연법칙 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연법칙을 탐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마치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물질 세계의 과학적 체계가 그 지적인 깊이, 복잡성과 명확성에 있어서 인간정신이 이룩한 가장 아름다우며 경탄할 만한 공동 작업의 소산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도 대다수의 비과학자들은 그 체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갖고 싶어 한다 해도 가질 수 없다. 광범한 지적인 체험의 세계에서 이 그룹의 사람들은 음치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음치는 타고나면서가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혹은 훈련의 결여에서 온 것임을 덧붙여둔다.
음치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무엇을 읽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영문학의 대작을 읽은 적이 없다는 과학자들에 대한 뉴스를 듣고 그들은 동정어린 쓴 웃음을 던진다. 그들은 과학자를 무지한 전문가라면서 무시한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무지와 특수성도 사람을 놀라게 한다. 나는 전통적 문화의 기준에서 볼 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모임에 자주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과학자들의 무지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는 일에 상당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참을 수가 없었던 나는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이 열역학 제 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반응은 냉담했고 또 부정적이었다. 나는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맞먹는 과학의 질문을 던진 셈이었다.
그보다 더 간단한 질문, 예컨대, “질량 혹은 가속도란 무엇인가?”(이 질문은 “당신은 읽을 줄 아는가”라는 질문과 동등한 과학상의 질문이다)라고 물었다면, 그 교양있는 사람들의 열 명 중 하나만 내가 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느꼈으리라고 믿는다. 이처럼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체계는 진보한다는데, 서구의 가장 현명하다는 사람 중의 대부분은 물리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석기 시대의 선조와 같은 통찰력밖에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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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문화(scientific culture)에 속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서구의 지식인들은 산업혁명을 이해하려고 힘쓰지 않았고 원치도 않았으며, 또 할 수도 없었다. 하물며 그것을 받아들일 턱도 없었다. 지식인, 특히 문학적 지식인(literary intellectuals)은 말하자면 타고난 러다이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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