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쪼록 이 글을 통해 학문이란 무엇인가, 또 그 위계와 서열은 어떻게 되어야하냐에 대해서 새로이 고민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패배주의 철학 : 개똥 철학
대부분의 패배주의 철학은 대개 개똥 철학이다. 내가 생각하는 개똥 철학이 뭔가 우선 개념 정리를 해보자. 그런데 개똥 철학을 정리하려면 우선 내 글에서 말하는 철학의 개념 정리부터 해야한다.
철학은 어원도 그렇고 실제 철학자들의 활동을 봐도 "지식에 대한 애정"이다. 출발이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원래는 모든 학문을 다 포괄한다. 어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 전통 - 철학은 모든 지식 생산 활동을 포괄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강하게 남아있다. 경영 대학에서 정보 기술과 그것의 경제적 의미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치는 필자의 학위명도 철학 박사, Doctor of Philosophy (Ph. D), 이다. 또 나는 내가 정보 기술 경제학을 연구하는 이유가, 철학을 하기 싫어서, 혹은 철학을 못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개인적 취향에 따른 판단이지만) 정보기술경제학이 철학과에서 하는 철학보다 더 유용하고, 내가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답하고 하는 데도 더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한다고 우긴다.

거의 모든 학문의 최종 학위에 철학 박사란 칭호를 붙이는 현상은 단순히 어원이 그래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철학의 기본 문제 -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이런 것들은 다른 개별 과학과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학문하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의 반영이기도 하다. 현대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연구하던 연구 분야의 99% 이상은 이제는 다른 (개별) 학과에서 연구한다. MIT 에는 "철학박사 (PhD)" 학위를 받은 2000 여명의 교수가 있는데, 언어학자들까지 합쳐도 언어철학과에 소속된 교수는 열 명 남짓이다. NYU 도 수천 여명의 철학 박사 교수진 중 철학과 교수는 10 명 남짓이다.
이 99% 이상의 개별 학문을 하는 철학 박사들과 1% 미만의 철학과의 철학자들과는 무슨 차이가 그리고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아직도 철학과에 속한 철학자들의 중심 문제는 존재의 문제, 인식의 문제, 가치의 문제 등이다. 프랑스 철학의 호들갑 학풍과는 달리 영미의 철학 학풍은 조용하고 차분한 분석 철학 (Analytic Philosophy; 언어철학, 과학철학 등의 현대 철학을 총칭하는 의미에서) 이 주도하고 있다. 칸트가 뉴튼이 정리한 근대 물리학의 체계에 기반을 두고 순수이성비판을 썼던 정신으로, 현대 영미의 주류 철학은 현대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요즘에는 생물학과 두뇌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존재, 인식, 그리고 지식 자체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외부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마느냐, 존재한다면 어떻게 존재하느냐, 그리고 우리 인간이 그 사실을 알 수 있느냐 마느냐, 알 수 있다면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들 - 철학의 중심 문제들은 동시에 근현대 이론 물리, 실험 물리의 중심 문제이기도 하며, 또 특히 20 세기에 들어와서는 진화생물학과 두뇌학 (brain science) 의 중심문제이기도 하다. 16 세기 이후의 근현대 물리학의 전통에서는
1) 우리 인간들의 생각 밖의 외부세계가 있다고 가정하고
꾸준하게 연구해왔고, 그런 질문들에 대한 매우 중요하고 확실한 답들도 얻어냈다.
예를 들어 "지구는 태양을 돈다," "분자는 원자들의 전자 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의 결합에 의해서, 다시 중성자 양성자는 또 소립자들의 결합에 의해서 형성 된다," "아마 소립자들은 스트링이 그 기본 요소일 것이다." . . . 이런 과학적 탐구의 결과물들은 사실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답이다. 우주 속에서의 인류와 나의 위치, 객관적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 기본 입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상호 동작하여 객관세계와 심지어는 주체인 우리의 몸과 뇌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들은 핵심적인 철학적 문제, 존재의 문제와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두뇌학과 생물학의 과제인 우리의 두뇌가 어떠한 진화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생물리화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두뇌의 활동과 외부 세계는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 가 하는 문제는 철학적 인식론 연구의 기반지식을 이룰 수밖에 없다.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지식이란 인류의 일상의 사고까지를 바꿀 수 있는 지식이다. 인류는 길게는 3천년 동안 짧게 잡아도 4 백년 동안의 광범한 개별 과학의 성과에 바탕을 둔 지식 체계의 덕분에 생각만이 아니라 인류의 일상적 삶까지도 송두리째 바꾸었고 아직도 바꾸어 가고 있다. 16 세기 이전의 인류보다 현대 인류는 평균 3 배 오래 살고, 키는 20 센티미터쯤 커졌고, 하늘과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며, 지구 반대쪽에 있는 사람과 인터넷 채팅을 한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타고 다니는 차, 집의 구조와 장식물, 컴퓨터와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눈을 들어 현대 과학과 공학의 지식이 녹아 들어가 있지 않는 사물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16 세기 물리학을 출발점으로, 근현대 과학의 기반을 형성한 존재와 인식에 관한 철학적 명제를 다시 정리해 보자.
"외부세계는 주체인 우리, 관측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인간 이성을 잘 활용하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정확한 정도로 외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이해는 우리, 주체의 생각과 삶에 유용하다."
이런 기본적 철학적 명제 하에서, 인간의 이성을 총동원한 개별과학의 꾸준한 진보는 우리 인류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단순히 철학적 명제에 대한 올바른 답이라는 의미에서 큰 선물일 뿐 아니라, 우주와 자연과 사회의 이해와 통제 능력에 있어서 그야말로 혁명적인 진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큰 선물인 것이다.
16 세기 이후 현대 사회가 발전 시켜온 자연과학과 공학 사회과학의 지식의 무게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 성과가 의미하는 바가 (Implications) 무엇일까. 몇 가지 만 생각해 보자.
우선 존재론과 인식론에 있어서 물리학자가 철학자 보다 무식하다는 생각은 발이 위로 올라간 생각이다. 거의 모든 철학박사 (PhD) 학위를 가진 연구자들이 대개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특히 소칼 같은 물리학자는 인류 지식 유산의 최첨단 수준에서 (knowledge frontier)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붙들고 허구헌날 먹고, 마시고, 잠자는 사람이다. 또, 생물리화학적으로 두뇌연구를 하는 과학자가 인식론을 따지는 철학자보다 인식론이란 철학적 문제에 있어서 무식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발을 머리 위로 올린 거꾸로 된 생각이다. 인식론의 근본 문제 역시 생물리화학적 연구 업적과 상호모순될 수가 없는 것이다.
조금 확대하면 가치론의 영역에서 예를 들어 경제학자들이 철학자보다 무식하다는 생각도 역시 발이 거꾸로 올라간 생각이다. 윤리의 문제는 어쩌면 존재론과 인식론의 결론이 어떠하던가에 아무 상관없이도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현대 경제학의 내용을 모르고 경제 정의, 경제 윤리에 대해 학문적으로 유의미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 것이다. 또 사회학과 법학을 모르고 그 윤리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강제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경제를 만든다는 얘기는 좋은 얘기지만, 어떻게 하면 왜 좋아지는가를 생각하려면 깊숙한 경제학 훈련을 해야하고, 그 결과를 사회에 강제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생각하려면 법학 훈련을 해야한다.
한마디로 정리해 보자.
제대로 된 철학이란 것은 개별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 그리고 적어도 길게는 3천년에 걸쳐서 짧게 잡아도 4 세기에 걸쳐서 위대한 성과를 내온 개별 과학은 아주 구체적인 존재론적 인식론적 철학적 명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철학적 명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외부세계는 존재하고, 인간 이성은 완벽하게는 아니라도 상당히 정확한 정도로 외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얻어진 지식은 우리의 생각과 삶에 도움을 준다."
이제 개똥 철학에 대해 정의를 내릴 때가 되었다.
개똥 철학이란 인류가 특히 근대 이후 발달 시켜온 객관적 지식의 체계에 기반하지 않은 철학, 그렇기 때문에 또 그 지식의 체계와 상호 모순을 표출하는 철학이다.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인류의 피와 땀이 어우러진 지식 체계를 무시하는 철학은 대부분의 경우 형용 모순이나 자살 테제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개똥 철학의 사례는 사이비 종교의 철학 체계이다. 그들은 우주의 탄생과 역사와 미래에 대해 그리고 외부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에 대한 (대개 신이 교주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식의) 확고한 철학이 있는데, 그 철학이라는 것이 현존하는 객관적 지식체계와 상충하기 일쑤다.
한 극단으로 이 개똥 철학이 정치적 파워와 연결이 되면 아주 큰 말썽을 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북한의 주체 사상은 대표적인 개똥 철학의 사례이자, 그 개똥철학이 말썽을 일으킨 또 인류사적 사건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은 계급 중심의 사상이고, 김일성 주의는 인간 중심의 사상이다, 그리고 주체 사상의 창시자 김일성과 그 완성자 김정일을 통해서 진리가 발견되고 전파된다 라고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허구 명제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개똥 철학이 주체 사상이다. 인간 중심의 사상은 옳은 데, 수령론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애초에 과학적 기반을 무시한 철학이기 때문에 황당한 수령론으로 나아가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철학의 종말은 두뇌수령 인민수족론으로, 그리고 수령의 수족인 인민들의 인류사상 가장 처절한 굶주림으로 결론이 나게 되는 것이다.
다른 개똥철학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착각은 위대한 이성의 성과인 근대 과학의 객관적 지식체계를 자신들의 머리 속의 말장난으로 상대화할 수 있다는 만용에서 나온다. 그 착각의 결과는 예외 없이 개똥 철학이다.
소칼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그래서 생각보다 훨씬 깊은 지성사적 의미가 있다.
소칼이 밝혀낸 것은 인류 첨단의 과학적 지식에서 기반해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이해는 천박하고 오류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우러러보는 들뢰즈 라깡 등의 자칭 철학자들이 우주와 그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에 대한 지식에 대해 -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에 대해 - 무지한 정도가 아니라, 무지하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 폭로한 것이다.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들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우주의 탄생과 미래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듯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임금님들도 역시 그런 착각 속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소셜 텍스트에서 뉴욕 타임즈와 르몽드까지 학술적으로 그리고 일반인에게 까지 영향력 있는 매체는 총동원하여 온 천하에 폭로한 것이다.

이 폭로는 지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현대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의 기본문제 - 존재의 문제, 인식의 문제 - 을 다루는 학문이고, 인류의 지식 체계 중 가장 확실하고 위대한 성과물의 집적이다. 엉터리 물리학 지식과 그 엉터리 지식을 진실로 착각하고 있는 무지와 오만을 가지고 존재론 인식론이 중심 문제인 철학을 제대로 할 수는 없다.
오해하지 말 것은, 내가 철학을 하려면 물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은 수학에 기반해서 하지만, 물리학자가 수학자가 될 필요는 없고, 특히 모든 수학 분야를 다 알 필요는 더구나 없다. 예를 들어 일반 상대론을 하는 사람이 현대 집합 이론에 대한 연구를 동시에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수학에 대해서 원래 그 수학분야의 생각과 모순되지는 않아야 하고, 또 더구나 그 수학을 자신의 연구에 사용하려면 그 수학에 대해 적어도 틀리지는 않아야 된다. 일반상대론을 하려면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틀리지 않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도 물리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첫째는 물리학에서 밝혀낸 지식 체계와 상호 모순되는 주장을 하지는 말아야 한다. 둘째는 물리학 지식을 자신의 담론에 사용하려면 적어도 그 지식에서는 틀리지는 않아야 되는 것이다.
소칼의 비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장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코미디나 소설 등 놀이 취미 상상 영역에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의 사랑인 심각한 철학을 하는 것이라면, 객관적 지식체계와 어긋나는 주장을 해서는 안되고, 더구나 그 지식체계에서 가져온 개념들을 사용하려면 그 개념들에 대해 적어도 틀리지는 말고 사용해야한다는 것이다.
소칼이 보기에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그렇지 못한 담론은 진지한 지식에의 사랑인 철학이 아니다. 그 보다는 작아 보이고 구체적인 문제, 왜 인간 암컷은 발정기가 없을까 (다시 말하면 아무 때나 발정기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객관적 관찰과 철저한 이성적 논리에 의존한 탐구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오히려 훨씬 중요한 철학 활동이다.
물론 사람이 이성적 노력으로 쌓아올린 객관적 지식체계만을 의존하여 사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식으로 생각하고 싶으면, 놀고 상상하고 장난치고 그런 영역에서 지내면 된다. 소칼도 나도, 애인과 수영장에서, 영화관에서, 혹은 침대에서 놀 때까지 수학 문제 풀 듯이 엄밀하게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말을 쓰고 나오는 순간 포스트모던 기버리쉬들은 (gibberish) 한 마디로 개똥 철학이 되는 것이다.
개똥 철학이라고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는 데 항상 진지할 수만은 없는 일일 테니깐. 개똥 철학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개똥 철학인줄 확실히 알고 있기만 하면 되고, 또 딴 사람들을 속이지 않으면 된다.
소칼의 지성사적 성과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개똥 철학가들이란 것을 확실히 보여준 데 있다. 그 개똥 철학으로 무장했으면 노는 데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고, 또 그런데에 아주 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진지한 지식에의 사랑인 철학은 아닌 것이다. 진지한 지식에의 사랑은 이성적 노력으로 쌓아 올린 인류의 객관적 지식 체계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 그 객관적 지식체계에 대해 무지한 사람, 그리고 무지한 줄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건설되는 것은 아니다.